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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탑


白江 너머 긴 바람/ 옛 기억에 붙들려

정림탑은 슬퍼라/ 노을맞아 더 붉어

함께 걷던 그 길은/ 추억 속에 묻혀도

탑그림자 너머엔/ 그대 얼굴 오롯해  


* 출처: 선생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kdkgk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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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


"정신이 기본적인 통할(統轄)을 가지고 몸을 잡아가는 것이며, 

강력하게 주위를 통제하며 물화에 반대하는 것이 정신의 힘이다, 

정신은 물화에 반대하고, 반사물이며, 소멸에 저항한다, 

정신은 놀라운 반엔트로피이므로, 

막강한 무질서속을 종횡하면서 질서를 창조하고 통할해 나간다.  

그러므로 정신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1로 갈 가능성이다."

장숙행에서 강의해 주신 위 내용을 복습하면서,  

나는 내가 상습적으로 내 정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태클을 걸어왔구나 하였다. 

조심하면서, 모른다모른다모른다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서서히 변침하여 정신적인 삶으로 방향을 틀어나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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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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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의 능동적인 실험, 경험들이 우리 마음의 능동성과 조응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간은 단지 죄로 고통받은 존재이고 마음은 가만히 세상을 보는 거울같은 존재가 아니고, 이제는 인간은 역사를 진보시키고 마음은 능동적으로 뭘 만드는 그런 새로운 주체가 생겼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마음의 능동성 개념이 (많이 나아가면) 마음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으로 확장 된다. 마음이 창조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정신이 창조한다는 말에 동의를 한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것은 발견과 발명이 같아지는 경우이다. 발견은 마음은 가만히 있는 것이고, 발명은 마음이 하는 것으로 엄밀히 구분된다. 그런데 어떤 영역에서는 마음이 창조하는 것을 마음이 발견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 넘어진 목검-불이현상)

일체유심조나 정신일도하사불성이 인식론적 방법론이거나, 자기계발 또는 도덕적 훈화로만 보아왔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몸을 지배(소화불량)하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있지만, 뇌에서 밖으로 나가는 정신의 진화를 우리가 상정하듯 마음(정신)과 외부 사물(사린)의 실제적 관련성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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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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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신개념을 제한하는 대신에 마음의 능동성을 시사하며 인간의 주체성 확보에 확고한 무엇을 주었다이후 헤겔은 인간과 신이 합일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막스는 노동하는 주체를 등장시킨다복습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셨다.

우리의 공부는 죽음마저 주체화한다책임의 깊이(不二)를 알수록 주체적 계기가 생겨난다.

실재와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주체도 있을 것이다안도 밖도, 존재도 부재도 아닌 층위의  <사이-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따금 과연 이 우주에서 인간의 개입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신다무언의 함의가 크다. '조각나 있음'을 조건 삼아야 하는 주체. 칸트가 마련해 놓은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안다'는 문제에서 실천적으로 사는 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일 때 필요한 지혜는 무엇일까.”(선생님)

<되기>가 먼저 떠올랐다. 

배운 바, 되기는 생활을 바꾸는 데에서 시작한다직입하여 를 바꿀 수 없기에 생활을 우회하는 것이다버릇과 태도와 동선을 바꾸고 이 반복이 누적되면 무의식을 친다무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한 <되기>가 있고, 그렇게 존재론적 차원을 맞물고 들어가는 앎이 있다.

공부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몸, 나의 생활, 나의 말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모른다를 세 번 말하고 조심하며, 조심할수록 힘 있게 나아가는 주체가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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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숙행 사진은 단빈, 유재, 연이정, 는길, 김ㅅ연 씨가 제공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