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에 드러난 1910년대 후반 조선의 人情, 습속, 제도, 삶의 정서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 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쪼이는 유월 별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 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1, 7p, 민음사)
무정의 도입부다. 1910년대에는 남성도 아닌 '여성으로서' 미국 유학을 거쳐 서구 문명을 배우는 길은 제도적으로 막힌 것과 매한가지였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허가된 경로를 거친 미국 유학생의 수는 27명 뿐이었다. 더군다나 여성 유학생의 수는 연평균 한 명에도 미치치 못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 소수성으로 인해 기명이나 호명이 가능할 정도로 회자되는 일이었다. 소설 속 김장로의 딸인 선형이 이에 해당한다. 여성의 미국 유학이라는 소재만으로도 희소성을 띤 사건성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가난한 식민지 지식인인 형식에게 김장로의 제안은 경제적, 정신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된다. 약혼이 성립되자 '형식은 꿈같이 기뻤다.' (83, 357p) 이를 거절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상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장로는 공사(외교관)로서 미국 워싱턴에 주재한 이후 서양, 특히 미국을 존경하게 된다. 미국에 사로잡혀 서양식 생활을 지향하는 김장로가 자신의 자녀인 선형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 위해서는 형식이 요구되어진다. 소설 속 배경이 된 시기에는 일제의 1차 「조선교육령」(1911년)에 의해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과목이 폐지된 상태였다.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선형이지만 미국 유학을 위해 요구되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가 없었다. 또한, 여성으로서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이민국의 제도적 제약을 피하기 위해 특정 조건을 갖춰야 했는데 이를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부합하는 자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성이었다. 마침, 형식은 일본 유학을 거쳐 경성학교 영어 교사라는 신분을 지닌 독신의 남성이었다.
경성 학교, 정신여학교
한일합방 이후 1911년 「조선교육령」에 따라 교육제도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및 중학교 등이 중등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경성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에 해당한다. ‘고등보통학교는 남자에게 고등한 보통교육을 하는 곳’이라 규정하고 교육목표를 ‘상식을 기르고 국민(일본인)된 성격을 도야하며 그 상황에 유용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친다.’라고 설정하였다. 수업연한은 4년으로 하고, 입학자격은 12세 이상의 수업연한 4년의 보통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학력이상자로 규정하였다.
교육정책 속에 여성들을 적극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1908년부터다. 1차 「조선교육령」(1911년)이 공포되면서 여성교육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남성교육과는 달랐다. 여성교육은 4년 과정의 보통학교와 3년 과정의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실시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진학하는 중등과정의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실시된 교육내용은 지식교육을 억제하고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치중한 기예 교육 중심이었다. 이러한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육 수준은 편지를 쓰고 신문을 볼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는 정도였다.
영어 교육
일제는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을 선포하여 관립 외국어학교를 없앤 후,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우고, 영어교육을 제한한다. 이 시기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영어 과목은 폐지되었다가 2차 「조선교육령」(1922년)에 영어교육이 가능해진다.
미국 유학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후 한국인의 구미 각국 유학을 허용치 않아 도미의 기회 자체가 거의 봉쇄되었다. 1910년대 한국에서 총독부 여권을 가지고 도미한 유학생의 수는 통감부총게연보에 집계에 따르면 미국 본토 26명, 하와이 1명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 한국 학생들의 도미 경로는 중국 상해였다. 여운형은 협화서국에서 일하며 1917년부터 1918년 중반까지 약 70여 명 남짓 조선청년들의 구미 유학을 중간에서 알선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사유는 협화서국 지배인인 피치(Fitch)박사가 한국독립운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소설 속 선형과 같이 총독부 여권을 지닌 채 미국 유학을 가는 여성은 연평균 한 명이나 가능한 극히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이는 미국 이민당국이 학생 및 여성들의 입국에 제약을 가했기 때문이다. 1914년 9월부터 이민국 조례를 만들어 학생과 여성에게 증서를 요구했다. 여성의 경우는 남편이나 약혼자를 찾아오는 경우만 가능했고 이마저도 남편이나 약혼자의 경제력 증빙을 요구하였다.
가정 교사
1910년대 ‘가정’과 ‘교사’를 합성한 ‘가정교사’가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가정교사의 출현은 근대에 급격히 변화한 교육 시스템의 산물로서 두 집단의 이해 관계가 맞물려 등장한다. 식민지 근대식 교육 시스템을 체화하고 학력 자본을 바탕으로 경제적 계층 상승을 도모하고자 하는 ‘젊은 지식인’과 ‘양반 기득권’으로서 경제적 자본은 갖추었으나 신문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형식이 하이칼라라고 부른) 가부장의 위기 의식의 만남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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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집은 황주야요. 동경 가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쟤는 제 동생이구요.”(88, 380p)
“영채는 좌우에 새로 이삭 나온 조발을 보며 지나간 일 삭간의 일을 생각한다. 몸은 비록 가만히 있었으나 정신상으로는 실로 큰 변동이었었다. 전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할 만한 큰 변동이 있었다. 죽으러 가노라고 가던 길에 우연히 병욱을 만난 일과 병욱의 집에서 칠팔 년 만에 비로소 가정의 즐거운 맛을 다시 본 것과 자기가 지금껏 괴로워하던 옥 같은 세상 밖에도 넓고 자유롭고 즐거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은 것과 또 병국에게 대하여 불타는 듯한 사랑을 느낀 것을 두루 생각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이제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러 감을 생각하매 일신의 운명이 뜻밖에 변하여 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혼자 빙그레 웃었다.”(102, 437p)
일본 유학
병옥은 동경 유학 중에 방학이 되어 황주로 돌아오다 영채를 만난다. 그리고 다시 동경을 향할 땐 영채와 함께한다. 1900년대 초기까지도 여성의 일본 유학은 그리 흔한 편이 아니어서, 1909년 무렵 일본에 있었던 212명의 한국 유학생 중 여학생은 9명에 불과했다. 한국 여성의 일본 유학이 증가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였다. 전체 일본유학생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지만, 1910년대는 대략 30-4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옥과 영채는 이 30~40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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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어멈의 말을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중문을 지나 안대청에 오른다. 전 같으면 외객이 중문 안에를 들어설 리가 없건마는 그만하여도 옛날 습관을 많이 고친 것이라. 대청에는 반양식으로 유리문도 하여 달고 가운데는 무늬 있는 책상보 덮은 테이블과 네다섯 개 홍모전 교의가 있고, 북편 길이나 되는 책장에 신구서적이 쌓였다.”(2, 13p)
“김 장로의 서재는 양식으로 되었다. 그가 일찍 미국 공사로 갔다 와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서양식 생활을 하려 한다. 방바닥에는 붉은 모란 무늬 있는 모전을 깔고 사벽에는 화액(書額)에 넣은 그림을 걸었다. 그림은 대개 종교화다. 북편 벽으로 제일 큰 화액에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의 화상이 있고 두어 자 동쪽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화액에 구유에 누인 예수를 그런 것이요, 서편 벽에는 자기의 반신상이 결렸다. 다른 나라 신사 같으면 종교화 밖에도 한두 장 세계 명화를 결었으련마는 김 장로는 아직 미술의 취미가 없고 또 가치도 모른다.”(79, 341p)
가정
1910년대는 '가정'이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다. 무정이 연재된 매일신보는 유일한 중앙지로서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이 자리잡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일 신보에는 가정 담론이 활발하게 부상했고 1915년 9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가정 박람회가 조선에서 개최되었다. 박람회에서는 "방 세 칸이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 주인내외와 남매가 등장하는데 남자주인은 안석에 의지하여 신문을 읽고 있고 아들은 그 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부인은 딸과 함께 바느질을 하는" 마네킹의 모습이 조선 상류층의 가정의 모습으로 진열돼 있었다. 1910년대 일본과 조선에서는 가정이란 사적 공간으로서의 근대 가족을 완성하는 이데올로기를 담론화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실제 상류층 가정의 공간은 소개된 가정과는 동떨어진 채 전통과 서양 문명이 혼재된 채 중층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김 장로 집은 한옥을 반양식으로 개조한 집이고, 가족 구성원으로 김 장로 집에 유숙하는 순애나 병옥의 집에 유숙하게 된 영채는 근대적 가정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전통적 성격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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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었다. 일 년급부터 사 년급이 되었다. 아무 지식도 없던 것들이 보통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학생들 생각에 자기네는 지나간 사 년간에 진보도 하였다. 자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일 년급 적이나 사 년급 되는 지금이나 학생들의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였다. 형식은 그 가진 바 지식을 온통은 아니라도 거의 다 자기네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자 기네보다 높다고 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형식에게 대한 표면의 행동은 전이나 다름이 없어도 마음으로는 형식을 자기네와 동등 또는 자기네 이하로 보게 되었다.”(69, 298p)
“아까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형식에게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불행한 사건이라. 형식의 전 희망은 그 사 년급에 있었고 형식의 전 행복도 그 사 년급에 있었다. 그 사 년급이 있는지라 형식은 적막함이 없었고 그 단순하고 무미한 생활 중에서도 큰 즐거움을 얻어 왔던 것이다. 그 사 년급은 어떤 의미로 보아 지나간 사오 년간에 그의 재산이었고 생명이었었다. 또 그의 전심력을 다하는 사업이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사 년급 삼십여 명 학생은 영구히 자기의 정신적 아우와 아들이 되어 마치 자기가 오매(寤寐)에 그네를 잊지 못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그네를 사랑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사랑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72, 310p)
교사와 학생
근대적 교육이 시작되며 교사와 학생이 출현한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교사(형식)와 학생(김종철/이희경)의 관계는 평등해 보인다. 김종렬과 이희경이 동맥 퇴학을 알리며 형식에게 동의를 구하는 장면에서 교사와 학생간 대화 사이에 하대가 없다. 대화가 평등한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형식이 종렬의 행동에 '예절답지 못한 데 불쾌한 생각이 나'(19, 87p)거나 종렬이 '왜 버릇없이'(19, 87p)를 말하며 희경을 흘겨보는 장면에서 전통적인 유교의 예인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교육은 서양 문명 즉, 지식을 배우는 것에 치중된다. 그러다보니 교육에서 지혜라는 깊이보다 지식의 양이 돋을새김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소설처럼 향학열의 부작용으로 인해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가 전복될 수 있다.
사오 년간에 그의 재산이었고 생명이었던 사 년급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은 형식을 울리고 결국 울리고 만다. '형식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71, 306p) 형식은 '예수 믿은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2, 12p)어 초월적-종교적 인정투쟁에 실패했으며,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조건과 한계로 현존 지배체체 속에서의 상향적 인정투쟁이 부재할 수 밖에 없었고, 자유 연애가 어려웠던 시대의 독신이었기에 연정이라는 이성 간 인정투쟁도 부재했으며, '학문의 정도 차이'(67, 289p)로 '소년 시대를 건너뛴'(67, 289p) 그로서는 수평적 교우의 인정투쟁도 실패했다. 그가 전심력을 다한 학생을 향한 인정투쟁의 실패는 그에 맞물린 보상의 위기 속에 자기 환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김 장로가 제안한 약혼으로 인해 그의 인정투쟁은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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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지는 아니하거니와 이이나즈케, 엥게지먼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자네 힘에 웬걸 되겠는가.' 하였다. 과연 형식은 아무 힘도 없다. 황금 시대에 황금의 힘도 없고, 지식 시대에 남이 우러러볼 만한 지식의 힘도 없고, 예수 믿은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으매 교회 내의 신용조차 그리 크지 못하다. 아무 지식도 없고 아무 덕행도 없는 아이들이 목사나 장로의 집에 자주 다니며 알른알른 하는 덕에 집사도 되고 사찰도 되어 교회 내에서 잰 체하는 꼴을 볼 때마다 형식은 구역이 나게 생각하였다. 실로 형식에게는 시철 하이칼라 처자의 애정을 끌 만한 아무 힘도 없다.”(2, 12p)
“선교사들은 김 장로가 서양 문명의 내용이 무엇인디 모르는 줄을 안다. 김 장로는 과학을 모르고 철학과 예술과 경제와 산업을 모르는 줄을 안다. 그가 중교를 아노라 하건마는 그는 조선식 예수교의 신앙을 말 따름이요, 예수교의 진수(眞髓)가 무엇이며 예수교와 인류와의 관계 또는 예수교와 조선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생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문명이라 하면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 서양의 문명을 이해한다 함은 즉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한다는 뜻이니 김 장로는 무엇으로 서양을 알았노라 하는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함을 안다. 그러므로 그네는 김 장로를 서양을 흉내 내는 사람이라 한다. 이는 결코 김 장로를 비방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김 장로의 차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79, 342~343p)
'하이칼라'라는 표현을 보면 형식이 김 장로의 집안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910년대의 하이칼라란 주로 사람을 수식하거나 어떤 특정 성향을 지칭하는 말로 부정적 함의로 활용되었다. 형식의 말로 하면 서양의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며 흉내만 내는 사람에 해당되겠다. 소설 속 곳곳에 드러나듯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 문명을 체화했다고 스스로 여기는 형식은 주체성이 결여된 채 전통 문명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서양 문명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알고 있는 하이칼라를 싸잡아 비판한다. 그가 근대적 교육을 통해 배운 서양 문명이 최종심급으로서 작동하지만 그가 속한 땅은 타율적 근대화가 졸속으로 진행되며 전통과 근대가 착종될 수밖에 없었고 형식 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이칼라
하이칼라의 어원은 메이지 30년대 메이지 시대 남자 양복으로서 유행한 하이칼라의 셔츠, 즉 와이셔츠의 깃에서 유래하였다. 마이니치신문의 컬럼니스트가 1898년 무렵 이 용어를 지면에서 사용하였다. 당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정치가이자 관료를 “태서풍의 칼라를 높이 올려서 잰 체하며 마치 방금 일본에 귀국한 것처럼 보이려는 것 같아 거슬리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한데서 비롯했다. 메이지 시기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문화는 정치가, 실업가, 고급 관원 등속의 지극히 소수의 상류계급들에게만 한정된 채 권위적이고 과시적인 소비형태로 확대되게 되었다. 하이칼라라는 말은 최초에는 이러한 상류층의 소비형태를 비판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하이칼라라는 말이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최소한 1910년 전후로 보이는데 1910년대 신문과 소설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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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인도 갑오 전 한창 서슬이 푸르렀을 적에는 평양 강산이 다 나를 위하여 있고 천하 미인이 다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리라. 그러나 갑오년 을밀대 대포 한 방에 그가 꿈꾸던 태평 시대는 어느덧 깨어지고 마치 캄캄한 밤에 번개가 번적하는 모양으로 새 시대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버린 사람이 되고 세상은 그가 알지도 못하던 또는 보지도 못하던 젊은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철도를 모르고 전신과 전화를 모르고 더구나 잠함정이나 수뢰정을 알 리가 없다. 그는 대동문 거리에서 오 리가 못 되는 칠성문 밖에 있으면서 평양성 내에서 날마다 밤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에는 선화당이 있을 뿐이요, 도청(道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영구히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리니 그는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이 세상 밖에 있음과 같다. 형식과 그 노인은 전혀 말도 통치 못하고 글도 통치 못하는 딴 나라 사람이로다.”(62, 272p)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 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녀들은 잘 알고 하는 것이언마는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렁성하여 소위 신구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 들어올 때에 으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마는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그러나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이 자기 아는 이상 알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신구사상 충돌의 비극은 그 책임이 흔히 낡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79, 344p)
“병욱은 여학생을 따라 선형이가 탔다는 차 앞에까지 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결에 갈 수가 없다. 선형은 하얀 양복에 맨머리로 창 밑에 서서 전송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대답하고, 그 곁 창에는 어떤 양복 입은 젊은 신사가 그 역시 연해 고개를 숙여 가며 무슨 인사를 한다. 전송인은 대개 두 패로 갈려서 한편에는 여자만 모이고 한편에는 남자만 모여 셨다. 그 남자들은 모두 다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이다.”(104, 445p)
“첫째는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아니함이니 아들은 동경에 가서 경제학을 배워 왔으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본을 내어 무슨 회사 같은 것을 조직하려 하나 부친은 위태한 일이라 하여 극력 반대한다. 또 딸을 동경에 유학시키는 데 대하여서도 아들은 찬성하되 부친은 “계집애가 그렇게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 어서 시집이나 가는 것이 좋다." 하여 반대한다. 방학하고 집에 올 때마다 부친은 반드시 한두 번 반대하지마는 마침내 아들에게 진다.”(93, 398p)
권력의 이동
1910년대는 조선의 전통 문화와 일본에서 전수된 서양 문명이 착종된 사회문화적 환경이었다. '신구사상의 충돌'(79, 344p)이다. 충돌은 충돌이지만 전통 사상은 지는 해이고 서양 문명은 떠오르는 해이다. 차츰 식민지 내 권력의 이동은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 즉, '젊은 사람의 손으로' 이동한다. 이제 어른의 '지혜로서 권위'는 사라지고 문명한 '지식으로서 권위'로 이동한다. 이로 인해 가족 내에서도 가부장의 권위가 실추되고 유학을 통해 문명한 젊은 자식에게 권위가 넘어가게 된다. 앞서 미국과 일본 유학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유학을 통해 서양 문명한 계급으로 차츰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소설 곳곳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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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이제는 되었소. 이제는 부모의 허락도 있고 당자도 승낙을 하였으니까 이제는 정식으로 권 모양이외다.” 하고 목사가 비로소 만족하여 웃는다. 목사의 생각에 이만하면 신식 혼인이 되었거니 한 것이다. 장로는 이제는 정식으로 약혼을 선언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그러면 혼약이 성립되었소." 하고 형식을 보며 “변변치 아니한 딸자식이오마는 일생을 부탁하오.”하고 다음에 선형을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친다. 형식은 꿈같이 기뻤다. ”(83, 357p)
“영채는 놀라며 "형님께서 나이가 많으셔요?" 영채도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달리 적당한 칭호도 없었거니와 또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오 년 장이랍니다." 하고 웃으며 "형님이 처음 시집을 때에는 우리 오빠는 겨우 열두 살이더라지요······. 형님은 열일곱 살이구. 그러니 무슨 정이 있겠어요. 말하면 형님이 오빠를 길러냈지요. 한 것이 다 자라나서는 도리어······." 하고 호호 웃는다. "오빠도 퍽 다정하고 맘씨 고운 사람이언마는 애정이란 마음대로 안 되나 봐요." 하고 두 처녀는 두 내외에게 무한한 동정을 준다. 영채는 "그러면 어쩌면 좋아요. 늘 그래서야 어떻게 사나요." "요새 젊은 부부는 대개 다 그렇대요. 큰 문제지요. 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터인데······." 하고 두 처녀가 마주 본다.”(93, 401p)
“선형이가 지금껏 가정과 교회에서 들은 바로 보건댄 다른 모든 사랑은 다 거룩하고 깨끗하되 청년 남녀의 사랑만은 아주 불결하고 죄악같이 보인다. 선형은 사랑이란 생각과 말이 원래 남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인 줄을 모른다. 이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관한 말은 적지 않게 선형을 불쾌하게 하였다. 선형의 생각에 자기의 지아비는 극히 깨끗하고 점잖은 사람이라야 할 터인데 그러한 소리를 염치없이 하는 형식은 죄인인 듯하다. 더러운 기생에게 하던 버릇을 내게다가 했구나 하고 선형은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형식이가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큰 손 속에 자기의 손이 푹 파묻혔던 것과 자기의 손이 아프도록 힘껏 쥐어 주던 것을 생각하고 선형은 무엇이 묻은 것을 떨어 버리는 듯이 손을 서너 전쟁 내두르고 치마로 문대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본즉 사랑하여 준다는 말과 손을 잡아주던 맛이 아주 싫지도 아니하였다. 그뿐더러 형식이가 힘껏 손을 꼭 질 때에는 전신이 찌르르 떨리는 듯이 기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 손을 내들고 보다가 방그레 웃으며 가만히 입에 대어 보았다.”(99, 424p)
“이러하는 동안에 아들도 낳고 딸도 넣고 지아비라 부르고 아내라 불렸다. 십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도 서로 저편의 속을 모르고 알아보려고도 아니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실로 신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는 면할 수 없는 천명으로 말 뿐이요, 일찍 이 관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라는 것은 대체 이러한 것이니 집에다 먹여 두어 아이나 낳게 하고 이따금 가 보아 주기나 하면 그만이라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서 못 얻는 재미는 기생에서 얻으면 그만이라 한다.
세상에 기생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식과 서로 대하면 이 문제로 흔히 다투었다. 형식은 엄정한 일부일부주의(一夫一婦主義)를 고집하고 우선은 첩을 얻든지 기생 외입을 하는 것은 결코 남자의 잘못하는 일이 아니라 한다. 과연 우선으로 보면 첩이나 기생이 아니고는 오랜 일생을 지낼 것 같지 아니하다. 우선의 일부다처주의나 형식의 일부일부주의가 반면은 각각 이전 조선 도덕과 서양 예수교 도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반면은 확실히 각각 자기네의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110, 468~469p)
혼인 제도
1일 : 안동 파출소 앞(우선), 김 장로 집(영어 과외), 집(영채)
2일 : 집(김종렬, 이희경), 학교, 김 장로 집(영어 과외), 집, 학생 기숙관, 다동(희경), 청량리(우선), 다동(영채), 집
3일 : 집(우선), 다동(우선), 평양 출발(노파)
4일 : 평양(노파), 경찰서, 노파 동생 집, 기자묘(계향), 경성 출발
5일 : 남대문, 집, 학교, 집, 김 장로 집(약혼), 집(우선)
영채가 재등장하기 전까지 형식의 개략적인 동선이다. 소설 2/3의 분량(1~85, 7~369p)이 고작 5일 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근대 소설의 효시라 불릴 만큼 분량의 대부분이 영채의 회상이나 형식의 상상이나 작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선형을 만나 약혼하기까지 5일이 지난 셈이다. 1900년을 전후로 이광수를 비롯해 식민 지식인들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담론화하였다. '조혼', '부모에 의한 강제 결혼', '과부의 수절', '남존여비' 등속의 전통적 결혼 형식을 비판의 대상으로 부각하고 당자의 의사에 따른 자유로운 배우자의 선택을 중요시했다. 자유로운 배우자의 선택은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가족 구조를 앞서 말한 '가정'으로 개편하여 사회의 기초 단위를 재정립하는 근대화 과정의 단초였다.
그러나 1910년대는 자유 연애가 담론화되던 시기였던 만큼 현실이라는 실지적 환경은 담론을 소화하기에는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다. 먼저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여성의 교육이 1908년부터 실행되었다. 1910년대 여성의 학교 진학률은 4%에 불과하였고 교육의 내용은 기예 교육에 치중되었다. 병국과 형식이 말한 '영육을 합한 전 인격적 사랑'(98, 418p)을 나눌 병옥과 같은 여학생(일본 여성 유학생 연별 30~40명 유지, 미국 유학생 연평균 1명)은 주위에서 쉬 찾기 어려웠고, 자유 연애를 위한 사회문화적 공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술한 선형의 심리를 살펴 알 수 있겠지만 형식과 선형의 혼인은 김 장로 집에서 두 번(두 시간)의 만남을 거친 후 '장난 모양'(83, 360p)으로 진행된 약혼이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형식의 약혼은 신식 혼인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부모에 의한 강제 혼인에 불과했다.
소설 속 김병국의 아내와 신우선의 아내는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다. 김병국의 처는 오 년 연장이고 우선의 '나이는 불과 이십오륙 세'(37, 168p)이니 역시 처가 4~5세 연장이다. 부모에 의해 조혼을 치렀을 것이다. 병국은 열두 살, 우선은 십오륙 세에 혼인을 치른 셈이다. '한번 부부가 된 이상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하여 예수교적 혼인관'(98, 418p)을 지닌 병국은 아내에게 받지 못하는 정신적 위안을 동생 병옥에게서 구해 보지만 '누이의 사랑에는 한정이 있다'(97, 417p)며 영육을 합한 전인격의 사랑을 말한다. 반면 전통적인 일부다처주의를 옹호하고 '아내에게서 못 얻는 재미는 기생에서 얻으면 그만'(110, 468~469p)이라고 말하던 우선은 정신적 융합이 없는 '기생의 조금(큰) 부족한 점'(110, 469p)을 말하며 영채가 자신을 사랑해 주면 기생집에 가기를 그친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910년대는 혼인에서도 전통과 서양 문명이 착종된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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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인은 원래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 좋고 글 잘하고 기무에 빼어나 평양 춘향이라는 벼명 듣던 사람이러니..(중략).. 김도령의 눈에 들어 십여 년 김 장로의 소실로 있따가 본부인이 별세하자 정실로 승차하였다. 양반의 가문에 기생 정실이 망령이거니와, 김 장로가 예수를 믿은 후로 첩둠을 후회하나 자녀까지 낳고 십여 잡 동거하던 자를 버림도 도리에 그르다 하여 매우 양심에 괴롭게 지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실이 별세하므로 재취하라는 일가와 붕우(明友)의 권유함도 물리치고 단연히 이 부인을 정실로 삼았음이라.” (3, 17p)
“내가 이제 옛날 처녀의 본을 받아 내 몸을 팔아 돈만 얻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옥에서 나오시렷다. 옥에서 나오시면 나를 칭찬하시렷다. 세상 사람이 나를 효녀라고 칭찬하고 옛날 처녀 모양으로 책에 기록하여 여러 처녀들이 읽고 나와 같이 울며 칭찬하렷다. 그러나 내가 내 몸을 팔아 부모와 형제를 구원하지 아니하면 이 어른과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불효한 계집이라고 비웃으렷다. 또 그동안 이 집에 있어 보니 그 부인도 본래 기생이요, 그 처녀도 지금 기생 공부를 한다 하며 매일 놀러 오는 기생들도 다 얼굴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마음들도 다 착한데…..: 하였다. 기생이란 다 좋은 처녀들이어니 하였다. 더구나 그 기생들이 다 글씨를 갈 쓰고 글을 잘 아는 것을 보고 기생들은 다 공부도 잘한 처녀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저는 결심하였습니다. 저도 기생이 되렵니다. 저도 글을 좀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아버지를 구원하려 합니다." 하고 영채는 말 수 없는 기쁨과 일종의 자랑을 감각하였다. 그 사람은 영채의 등을 만지며 "참 기특하다. 효녀로다. 그러면 네 뜻대로 주선하여 주마." 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기생이 된 것이라.”(15, 78~69p)
“이렇게 배 학감은 전 교내의 배척을 받아 오던 데다가 근래에는 무슨 심화가 생겼는지 다동, 구리개 근방으로 부지런히 청루를 방문하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번 소동이 일어난 것이라. 형식은 '방관할 수 없구나.' 하고 곧 학교로 갔다.”(21, 98p)
“기생은 소리와 춤으로 객을 대하는 것이라 하건마는 기실은 어느 기생치고 밤마다 소위 ‘손을 보’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김현수나 배명식의 생각에 기생이라는 계집사람은 모든 도덕과 모든 인륜을 벗어난 일종 특별한 동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오늘 저녁에 한 일이 결코 도덕이나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인 줄로는 생각지 아니한다. 다만 귀찮은 법률이란 것이 있어 ‘부녀의 의사를 거스르고 육교(肉交)를 한 것'을 강간죄라 할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40, 178~179p)
무정에는 주인공 영채 이외에도 많은 기생들이 등장하고 언급된다. 영채의 기생 어머니인 노파는 물론, 정절을 잃고 영채가 자살로 뒤좇고자 하는 월화, 형식이 평양에서 만난 어린 기생 계향과 그 어머니, 선형의 어머니는 ‘부용’이라는 유명한 평양 기생이고, 형식의 서조모는 기생 출신이었다. 영채는 왜 하필 '다동 기생'이라 불리게 되었는가?
영채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거친 여정은 안주에서 시작된다. 안주에서 시작된 여정은 '숙천 어떤 촌중에서 아이놈들에게 고생'(13, 61p)을 거처 '그 이틀날 어느 주막에서 어떤 악한에게 불들려 하마터면 큰 괴변을 당할 뻔하'(13, 61p)고 '순안 석암리 근방에서 금점꾼에게 불들려 고생하'(13, 61p)며 평양에 이른다. 평양에 이르러 하필 유숙하게 된 곳이 평양 기생 교습소(서재)였다. 결국 영채는 못된 어른에 꾀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옥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몸을 팔며 기생이 된다. 평양에서 형식을 찾기 위해 상경한 영채는 평양 출신 기생이 설립한 다동조합에 속하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궁중과 지방 관청에 소속된 관기가 해고되었고, 1907년 궁중에 남아있던 관기제도마저 전면 폐지되었다. 기적에 오르면 천민 신분이 세습되는 제도도 사라졌지만 가난하여 호구지책으로서 기생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아 기생 수는 외려 증가하였다. 형식은 기생에게 '~씨'라 부르며 하대를 하지 않았지만 심리적 묘사에서 정절을 지키지 않은 영채를 천하게 여긴다.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속에 등장 인물들을 살피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위만 다를 뿐 기생을 천민으로 여기는 전통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분제라는 전통과 평등 사상이라는 근대가 착종돼 있다.
다동 기생
1910년대에 이후에는 기생조합의 설립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삼패 중심으로 구성된 한성조합은 관기 출신 유부기로 재구성하며 광교조합으로 개창하고, 1913년에는 평양 무부기를 중심으로 다동조합이 만들어진다. 1916년에는 삼패 출신 기생조합인 신창조합이 설립되고, 1918년에는 경상도, 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설립된다. 소설 속 영채는 열두 살에 평양에서 기생이 돼 열아홉에 상경해 다동에서 활동을 하였으니 다동조합에 해당된다.
다동조합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서울 다동에 설립됐다. 첫 기생조합인 한성조합에 반기를 들고 평양 출신의 기생 주산월, 난향, 금주, 옥진 등이 주축이 되어 별도로 조직한 기생조합이다. 다동조합 설립 초기에 세간에서는 '무부기(無夫妓)조합'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 후 경시청은 기부가 있는 자는 기생이 될 수 없도록 강제했다. 그렇기에 기생조합을 구성하는 기생도 부기가 없는 무부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동조합이 무부기 조합이라 불린 사유는 다동조합의 설립 주체인 평양 기생들이 한성조합의 기생들과 차별화를 위해 한성조합의 설립 주체가 기존의 부기였던 것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무부기 조합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기생이 부자를 만나 기적을 떠나는 일을 기생의 은어로 ‘떼들인다’고 한다. 기생을 떼들이는데는 복잡한 절차와 많은 금전을 요구한다. 먼저 기생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동의를 얻은 후에 기생집에 들어가 며칠간 같이 생활해야 한다. 기생 어머니는 영감이 기생을 떼들일 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기생 어머니가 딸(기생)의 신랑 될 사람 됨됨이와 재력 등을 살펴 요모조모 저울질하고 성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성사가 결정되면 영감은 신방을 차리고 혼수를 장만하여 신방을 꾸미고 대금업 회사에 빚진 것이 있으면 모두 갚은 다음 떼들이게 된다. 기생은 기생조합에 영업장을 돌려주고 영감을 따라나설 때 하인들에게 돈을 쥐어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이것을 행하라 칭한다. 떼들이기 위한 비용은 평균 1~2 천 원(소설에서 영채를 떼들이는 비용은 천 원이었다) 정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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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126, 53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