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인 一味
며칠 후면 어머님 제사다. 가신지도 꽤 되었고, 게다가 내 나이도 나이인 만큼 이젠 정말 놓아드려야겠다 싶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이른 새벽에 어머님을 생각하며 썼던 글로 송별사를 대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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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 만남, 헤어짐
(1) 헤어짐
엄마와 나의 첫 헤어짐은 내 열한살 적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두 형이 유학하고 있는 대구로 나를 전학시킨 것이었다.
막내인 나는 그 나이에도 엄마 품에서 엄마 젖을 만지며 잤다. 내가 젖먹이일 적에 엄마의 젖이 말라버려 젖을 먹지 못하고
미음이나 쌀뜨물을 먹고 자라선지 유독 엄마의 젖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게다가 막내였으니 동생한테 뺏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젖을 제대로 못 먹은 내가 불쌍해서 만지는 것만이라도 마음껏 하게 내버려 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나의 앞날을 위해 80리 떨어진 대구로 유학을 보냈으니 엄마는 매일 밤 잘 때마다 얼마나 내가 보고싶었을까?
그 때 엄마 나이 마흔한살이었고 나와 엄마의 38년간 헤어짐이 시작되었다.
(2) 만남
내가 엄마의 따뜻한 삼시 세끼를 다시 먹게 된 것은 38년이 지난 마흔아홉살 때였으니 엄마 나이 칠십아홉이 되던 해였다.
그 해 오월 경이었던가? 두류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같이 두류공원으로 갔다.
오월의 초저녁 바람이 엄마와 나를 상쾌하게 맞아주었다.
매장을 지나치며 나는 엄마한테
“머 물랍니꺼? (뭐 먹으렵니까?)” 하고 물어보니 아이스크림을 먹겠다 하시길래 브라보콘 두 개를 사서 매점 노천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 옛날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날 엄마와 같이 칠성운동장에서 독일 서커스 구경을 하며 먹었던 삼강하드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엄마가 사주셨는데 지금은 내가 사드리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 날 밤 엄마 얼굴은 아이다의 화려한 무대처럼 밝고 화사하게 보였다.
(3) 남은 헤어짐
‘이번에 내려갈 때 그 옷을 갖다 놔야겠구나! 연락받고 바로 대구 가도 입을 수 있도록...’
오늘 새벽, 잠이 깬 채로 자리에 가만 누워있던 중 문득 든 생각이다. 검은 정장인 그 옷은 내가 갖고 있는 옷 중 제일 비싼 것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알 리 없지만 첫 번째 헤어짐과는 다른 헤어짐이 아닌가?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막내가 멋있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시면 그나마 이승을 뜨는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지 않을까?
천년 자리 만년 자리 내 치수에 맞는 자리
팔 보살이 닦은 자리 황금 으로 뿌린 자리
이내 몸이 갈 적에는 좋은 날 좋은 시에 자는 결에 인도하소
(어머님이 평소 머리맡에 두고 외우시던 글)
= 孟郊, 遊子吟 (집 떠난 아들의 노래)
慈母手中線 (자모수중선) 인자하신 어머니 손에 든 실,
游子身上衣 (유자신상의) 길 떠날 아들이 몸에 걸칠 옷.
臨行密密縫 (임행밀밀봉) 떠날 제 촘촘히 꿰매는 건,
意恐遲遲歸 (의공지지귀) 돌아옴 더딜세라 걱정해서지.
誰言寸草心 (수언춘초심) 뉘 말하느뇨, 한 치 풀 마음으로
報得三春暉 (보득삼춘휘) 봄볕 사랑을 갚을 수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