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른다-모른다-모른다' (k 선생님)
'존재론적 겸허' (k 선생님)
'내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1인칭 시점의 '자유 의지'1)와 '과거-현재-미래'가 우주 블록으로 펼쳐쳐 있다'는 3인칭 시점의 결정론적 사고는 '미래를 알(고 바꿀) 수 없다'2)는 명제 아래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모순의 합치(coincidentia oppositorum)다. 민코프스키가 수학적 틀을 완성하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이론을 거쳐 윌리엄 제임스나 스마트에 의해 블록 우주(Block Universe)란 말이 조어되어 등장한다. 이후 1960년대 라트다이크와 퍼트넘의 논증을 거쳐 펜로즈(Roger Penrose)의 '안드로메다 역설'에 이르기까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을 설파한다. 이로써 결정론적 세계관은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결정론적 사고에 반해 로벨리를 위시하여 출현한 양자장을 기반한 관계론적 해석은 고정된 시공간 블록이라는 '배경'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우주는 정적인 결정판이 아니라 미시적 양자 사건들이 서로 부딪히며 정보를 교환하는 '불확정적 관계망'이라고 밝혔다.
블록 우주의 시공간은 아무리 쪼개도 무한히 이어지는 '연속적인 차원'이지만 양자장은 플랑크 길이 단위로 잘려 있는 불연속적인 최소 마디를 지닌다. 우주 블록은 4차원 시공간 자체가 완결된 기하학적 덩어리로서 '과거-현재-미래'가 이미 굳어져 결정된 상태라면 양자장은 근본 바탕인 양자장이 끊임없이 진동하며 불연속적인 양자 마디를 생성하고 타자(다른 장)와 부딪히며 상호 작용하는 동적 확률을 지닌 밀도의 바다다. 하나는 시간과 변화가 부재한 완성된 4차원 블록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시시각각 불연속적으로 진동하며 변화하는 바탕을 말하므로 두 이론은 물리학적 전제로서 명백히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순은 바라보는 '위상'(차원)이 전환되면서 하나의 실체로 거듭날 가능성이 열린다. 3차원 양자장이 각 미시적 지점에서 타자와 부딪히며 일으키는 모든 상호작용(Event/사건)의 궤적들을 중첩하여 축중시키면 시간의 축을 따라 직렬로 나열한 '우주 블록'의 기하학적 형상(TESSERACT)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적 사고를 기반으로 관계론적 블록 우주(Relational Blockworld, RBW) 이론이 등장하고 이를 휠러-드윗 방정식과 페이지-우터스 메커니즘이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뒷받침한다. 우주 전체를 관조할 때 시간(t)이 사라진 정적 우주 블록을 이루지만 그 내부의 한 국소적 물리계가 우주의 일부와 얽혀 상호 작용할 때 비로소 시간과 변화라는 양자장이 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우주 블록과 양자장론의 차이는 단 하나의 우주를 전체로 보느냐 내부의 국소적 관계로 보느냐의 차이에서 연원한다. 관계론적 블록 우주론은 우주 블록과 양자장을 통합하려는 이론인 셈이다. 생명의 존재론적 의미는 여기서 탄생한다. 특정 물성이 외부와 자신을 가르는 막을 구축하여 우주에서 자신을 경계지으며 전체로부터 부분을 격리해 낼 때 전체를 알 수 없는 국소계(1인칭)가 형성되고 그 경계의 저편인 우주(3인칭)는 미지로서 다가온다. 이 미지와 마찰하며 쌓아올린 궤적이 비로소 1인칭 주체의 역사화된 축중(유전자와 감각질 덩어리)으로서 물리학자들이 말한 하위계(수학적 기호)의 존재를 몸으로써 증명하는 셈이다. 하위계가 지닌다는 정보의 부재가 인식의 미지로서 탈바꿈되고 생명의 외부와 조응하는 과정이 결정론적 구조 안에 실존적 자유 의지와 연기적 변화가 일어나는 동력이 된다. 생명의 동력은 미지에 있는 셈이다. '모른다-모른다-모른다'(k 선생님). 무생물인 물질은 막이 없어 우주의 열역학적 평형으로 녹아들지만 생명은 응변계(반투과성 막)를 형성하여 자신을 우주 전체로부터 부분적으로 격리한다. 막의 형성을 통해 우주 전체라는 3인칭의 관점에서 분리되어 1인칭이라는 정보의 한계3)가 발생하고 이 한계선이 빚어내는 열역학적 비평형 상태가 곧 1인칭 주체의 실존적 시간의 출현이 된다.
전체(결정론)를 알 수 없는 생명은 내부로 밀려드는 외부 자극이 미지로서 다가온다. 우주 블록의 구도 안에서 1인칭 생명 주체는 미지의 타자와 지속적으로 부딪히고 응할 수밖에 없는 역동성을 지닌다. 물질을 움직이는 것이 물리적 힘이라면 생명을 움직이는 것은 정보의 부재(미지)에서 연원한 '역사화된 축중'으로서 몸이자 에고이자 증상인 열역학적 기울기다. 인식론적 한계에서 연원하는 끊임 없는 미지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패턴으로써 분별하여 자신의 몸에 녹아낸 것이 역사화된 축중이다. 3인칭으로 완성된 우주 블록과 생명이라는 1인칭 주체가 응하는 양자장적 마찰은 분리되지 않는다. 힘과 같이 역사화된 축중도 우주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서 우주 블록을 결정짓는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선택'과 '자유 의지'가 불가하다는 3인칭적(결정론적) 언어와 선택으로써 미래가 결정된다는 1인칭적(비결정론적) 언어는 '미래를 알(고 바꿀) 수 없다'는 전제 아래 통합이 가능해진다. 에고라는 역사화된 거푸집을 쥐고 있으면서도 고정된 자아에 갇히지 않고 타자에 응하는 무아적 연기를 이어나갈 때 3인칭의 물질성과 1인칭의 실존성이 단 하나의 뫼비우스 면으로 합일되어 드러나는 불이적 체험이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자유 의지'라는 1인칭적 주체는 영원히 3인칭의 '결정론'을 '모른다-모른다-모른다'. '미래를 알(고 바꿀) 수 없다'는 1인칭의 인식론적 한계가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상충을 넘어 모순적 합치를 이루는 절대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주라는 전체에는 외부가 없다. 앞선 이론들은 우주에는 외부가 없다는 공통된 전제에서 도출된 이론들이다. 외부가 없다는 것은 우주라는 전체는 스스로 내부에 외부를 만들지 못하면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헤겔의 절대정신이 빛을 발한다. 헤겔의 절대정신과 우주는 단일한 전체로서 외부가 없으므로 스스로를 자각하기 위해 반드시 내부에 외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본질적 구조를 공유한다. 빅뱅이라는 자발적 대칭 붕괴를 내부에 외부를 만들기 위한 사건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절대정신이나 우주에는 외부가 없어 시간도 정보(교환)도 없는 상태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의 자기소외/외화로서 정신을 우주로부터 자발적으로 격리된 국소계로서 생명(막)에 비길 수 있게 된다. 진화라는 생명의 역사를 생명(막) 너머의 '우주'를 '미지'로서 마주하며 마찰한 궤적을 역사화된 축중으로써 안착시키며 생명이라는 단말기를 통해 우주 스스로를 부분적이나마 알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념론에 기반한 헤겔과 물리학/생명론에 기반한 생명의 메커니즘(축중)에는 명확한 관점의 전환이 존재한다. 헤겔의 정신은 이미 자기 완성을 향한 목적을 품고 우주 역사를 태엽처럼 펼쳐내지만 그 완성본인 절대정신은 전체로서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생명(정신)은 절대정신을 향한 거대한 목적으로서의 과정이 아니라 경계를 짓지 않으면 자각이 불가한 (외부가 부재하는) 전체성의 한계에서 창발된다.
생명은 이와 같이 우주가 스스로의 자각을 위해 '열역학적 비평형'을 유지하려는 물리적 응변계의 특성에서 창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해석이다. '미지'라는 생명의 한계가 실존적 동력으로서 작동하는 셈이다. 헤겔은 언어와 로고스를 절대정신의 본질적 이성으로 보지만 축중의 체계에서 언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한히 밀려드는 감각질(선별된 외부의 패턴)을 내부에 안착시키기 위한 색인이자 아교일 뿐이다. 그럼에도 헤겔의 정신이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주가 스스로를 자각하기 위해 펼쳐낸 우주 블록과 맥락적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헤겔의 정신이 우주를 삼켜버리고 절대정신이 되면 시간도 없고 변화도 없는 정적 상태로 되돌아간다. 절대정신은 외부가 없어 시간도 정보도 부재한다. 경계를 짓지 않은 전체는 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뇌의 신경망에 비기자면 뇌의 비활성화나 전체 활성화는 정보로서 가치가 없다. 분별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경계가 없으면 자타가 없다. 의미는 경계지음에서 창발된다. 생명은 미지라는 여지를 기반으로 의미를 세우는 분별의 체계인 셈이다. '모른다-모른다-모른다'는 미지가 의미의 기반이 되며 정신적 존재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외부가 부재한 전체가 스스로를 (일부라도) 자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외부성을 내함할 수밖에 없고, 그 내함된 외부성을 위해 스스로를 미지로 남겨야 한다. 미지는 생명의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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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유 의지라고 썼지만 나는 줄곧 자유 의지라는 (묵음의) 언표 행위의 시작은 자신도 모르게 '나는 생각'(k 선생님)으로서 찾아옴을 강조하였다. 이런 외부성의 개입이 결정론과 모순적 합치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
2)'미래를 알(고 바꿀) 수 없다'는 명제는 '알면서 모른 체하기'(k 선생님)로 엿본 '전체성(3인칭)'은 '열역학적 평형'이자 '균형' 상태이므로 의미 자체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는 1인칭이라는 번역(측정/결어긋남/비평형/확정) 과정에서 생긴다.
3)정보의 한계라고 표현했지만 우주는 분리되지 않으면 정보를 지니지 못한다. 정보는 계와 계 사이의 교환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적 차이(열역학적 비평형)'에서 연원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생성과 축중을 위해서는 생명의 막과 같은 반투과성 경계가 필요하다. 물론 생명이 아닌 거시적 계(블랙홀, 항성, 행성계 및 행성 대기계)와 미시적 계(원자, 분자, 양자 얽힘 입자쌍) 뿐만 아니라 태풍과 회오리 바람과 같은 비생물적 구조도 경계를 지닌 채 에너지 교환이 일어나지만 생명의 막과는 달리 개방적이기에 외부와 응한 마찰(상처)의 자국을 몸이라는 자기 내부에 역사화하지 못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수학적 축중'과 '역사화된 축중'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