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세대> 발제 9~10장 축약은 책의 요점 정리로 대체합니다. 저자와 다르게 집단 행동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발제가 비관적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집단 행동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 문제와 균열의 지점을 먼저 살피자는 의미에서 준비하였습니다.
<발제>
수치화의 딜레마
스마트폰이라는 거대한 주의력 착즙 기술 앞에서 개인이 끝내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빅테크의 막강한 자본력이나 법 제도의 미비 때문만이 아니다. 그 모든 기술적 · 사법적 공격을 막아내 줄 최후의 방어선인 '공동체성'이 완전히 해체된 역사적 배경이 크다. 고도 자본주의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와 국가의 사법적 치안 인프라는 역설적으로 '이웃의 도움이나 연대 없이도 돈과 법만 있으면 홀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이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타인과의 공대와 양보, 신뢰의 규범을 삶의 영역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처럼 연대의 필요성이 사멸하여 텅 비어버린 진공 상태를 사법 시스템이 꿰차면서 인간 관계는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관계가 아닌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별적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적 계약 관계로 단순화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마트폰의 폐해에 대응하려는 <불안 세대>의 저자가 제언한 집단 행동이 원천적으로 마비되는 치명적인 구조적 균열이 발생한다. 스마트폰(자본)이 파괴하고 있는 아동의 문해력이나 정신적 피폐함은 정밀하게 수치화하기 힘든 비가시적 영역이다. 일상의 체감이 집단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위험이 체계의 언어인 수치화로 번역되어 광고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술과 담배와 같이 단일 변수로서 폐해의 원인으로 측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치화를 만드는 주체(학계)와 자료는 모조리 자본의 영향권에 있으며, 광고주는 자본 그 자체다. 그렇기에 자본 친화적인 국가에서 스마트폰을 일괄적으로 제재하는 법률 제정은 바늘 구멍에 낙타가 통과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법률 제정을 기다리기에 앞서 학교나 지역사회 같은 밀착된 공간이 학칙이나 마을 규범이라는 자치적 통제권을 발휘하는 소규모 집단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성이 사멸한 현대 사회에서 학교나 마을은 더 이상 공적 가치를 위해 서로의 불편을 감내하는 연대의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 권리와 서비스가 상호 충돌하는 소비의 공간으로 저락한지 오래다.
그 결과 스마트폰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려는 학교나 교사의 소박한 시도는 '학습권과 공공성'이라는 공동체적 명분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즉각적으로 '헌법상 통신의 자유와 인격권을 침해당했다'는 개인의 사법적 공격과 민형사상 소송이라는 칼날 앞에 맨몸으로 노출된다. 자본은 학술 생태계를 자본으로 포섭하거나 소송으로 겁박하고 데이터를 독점하여 유해성의 법적 수치화를 봉쇄해 둔다. 사회는 자본과 사통해 법적 소송이 일상화되어 공적 중재 인프라가 파괴되고 만다. 결국 개별 학교와 교사는 사법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보신주의적 방관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법률에 의한 사적 계약 관계로서 부모와 교사, 시민들이 서로를 잠재적 가해자나 소송 상대방으로 인식하는 한 '함께 스마트폰을 치우자'는 소규모 집단행동조차 개별화된 법적 공포를 뚫지 못하고 무너진다. 우리는 자본이 만든 알고리즘이라는 중독적 기술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에 맞설 유일한 무기인 공동체적 연대를 물질적 풍요와 사법화의 대가로 이미 상실해 버렸다. 그 결과는 차마 끔직한데 각자의 거실에서 외롭게 아이의 전두엽이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갇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상 '대중 전체가 자발적으로 편의성을 주는 매체를 거부하고 과거의 매체로 돌아가 전원 수용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이 생산한 매체가 대중의 욕망 및 편의성과 결합하여 사회의 표준이 된 이후 사회 전체가 이에서 벗어난 사례는 매체의 '거부'가 아닌 더 편리한 매체로의 '대체'였다. 대중 전체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피처폰이나 오프라인으로 돌아가는 일은 자연이 아닌 문화적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 전원 수용을 가능하게 했던 유일한 예외는 국가의 물리적 강제라는 공권력의 개입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유일한 언어인 '수치화'에 갇혀 있다. 핸드폰이 가져오는 폐해는 체험되지만 자본의 가림막을 뚫고 비용으로서 산정되기 어렵다. 어렵사리 수치화되고 그 비용이 수익의 역치를 넘어서야 국가가 개입할 가능성이 열린다. 국가라는 물리적 강제력이 작동할 때까지 체계는 자기 파괴의 임계점으로 달려갈 뿐이다. 전체로서 변화가 불가능하기에 소규모 공동체로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지만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공동의 언어인 수치화가 부재한 채 집단 행동이 이루어질리는 만무하다. '수치화의 딜레마'다.
<의제>
아이가 밖에서 다치게 되면 '아이가 놀다 보면 다칠 수도 있지'라는 언사 대신 '치료비'와 '위자료'를 계산하고 청구할 대상을 찾는 시대이지요. 공동체를 유지하던 언어들이 모짝 사라진 자리를 '값'이라는 언어가 꿰차고 있으며, 이는 법이라는 체계의 언어가 보필하고 있습니다. 개별화를 기반으로 파편화된 욕망을 먹고 사는 자본의 시대에 '값'이라는 '수치'로 번역되지 못한 언어는 함께 나누지 못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장되고 맙니다.
아이를 밖에서 놀리지 못하는 사유로서 부모로서 체감한 바는 저자의 진단과 다릅니다. 첫째는, 매체의 변화로 위험 요소가 예측 불가능성을 띠는 사유가 큽니다. 스마트폰도 이에 한몫을 하지요. 둘째는, 아이를 매개로 타자에게 피해를 주거나 받는 경우 그 관계의 형식이 '비용을 부담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로 치우친 세태에 있습니다. 위험에 대한 예측과 대처, 그리고 위험에 곁따른 비용 부담 주체가 공동체성을 잃고 개인으로 전가돼 그 비용이 커진 탓이지요.
스마트폰의 사용을 늦추고 법제화하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매체의 특이성으로 인해 '수치화의 딜레마'에 갇혀 오고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일상에서 기울일 수 있는 가까운 노력은 말의 변화에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의 언어는 (스마트폰을 매개로) 어른들의 언어를 대물림하니까요. 잃(잊)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른이라는 일상의 말이 바뀌어야 합니다. 타자와 관계 맺기에서 '값'이라는 일차원적인 언어를 넘어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응하기가 필요하지요. '값이 아닌 가치'의 겹침을 위해 요구되는 응하기는 어떤 형식을 지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