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평택시 계루지1길 7 <민세안재홍선생 생가>)
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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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숙행 하면서 노래를 배웠다.
우리는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난 나는
난 나는
난 나는
학교다
본 적 없는 장소다
난 나는
난 나는
난 나는
학교다
다시 없을 꿈이다.
니가 사는 세상 어긋나고
니가 믿는 길은 어리석어
어울려서 걷는 이 걸음에
어리눅어 산다 내 동무여
난 나는
난 나는
난 나는
학교다
본 적 없는 장소다
난 나는
난 나는
난 나는
학교다
다시 없을 꿈이다
다시 없을 꿈이다
나는 혼자서도 노래를 불렀다.
말보다 노래를 더 많이 했던
지나온 어느 시절도 떠올랐다.
모든 노래는 종교적인 느낌이 있고,
말보다 오래 머물러 있다.
한 번 받아들인 노래는
노래 저 혼자서도 머릿속을 맴돌며 노래 부른다.
노래는 말이나 대화보다
더 오래 되었을 테다.
더 몸에 가까운 듯하다.
(2) 장숙행 마지막 날 차방에서 상인이 지금 사는 곳은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좋은점을 말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때 선생님께서 현충사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현충사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있지만,
선생님께서 현충사 이야기를 하셨을 때에야 그 사실을 떠올렸다.
밤 늦은 시간에 혼자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순신장군사당이 있는 동네이니 괜찮을 거야 속으로 생각하면서,
밤길의 긴장을 누그려뜨린 적은 자주 있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현충사 산책을 권하고,
손님이 괜찮다고 하면 현충사에 꼭 들러 손님과 함께 사당에 묵념을 한다.
현충사는 사람들이 잘 보살피고 있어서,
그곳에 들어서면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안하다.
(3) 장숙행 공부시간에
"시간의 과정 전체가 진리다.
시간이 없는 단면적인 것에는 진리가 없다." 고 들었는데,
이 땅의 시간(역사)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형국이
땅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장숙행에서 찾아간 박헌영 생가에는 표지석이나 안내석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대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작은 빈집 한 채가 자신을 무화시키려는 힘에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집은 남아 있다"며 나를 위로했다.
민세 집터는 후손이 살고 있으면서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방치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집 주변이 온통 공사현장이었다.
그 집만 간신히 헐리지 않고 있었다.
스산한 마음은 수유리 몽양의 묘지에 와서 안심을 얻었다.
몽양의 묘지는 사람들 사는 동네에 있었고, 잘 보살펴지고 보존되고 있었다.
나는 이순신장군에게 빚지고 있는 존재라는 각성의 차원으로라도,
누군가 너 어디 사냐고 물으면 꼭 잊지말고
현충사 가까이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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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 자기와 (얼굴이) 닮은 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 (일동 침묵)
- 항상 남은 닮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와 닮은 사람은 (자기 눈에는)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로 말하자면, 나와 닮은 이 만난 적이 없다. 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내심 불편하거나 기분이 좋았던 경험은 있다. 나 역시 타인을 누군가와 ‘닮았다’고 대강 범주화하며 말이다.
선생님의 물음은, 어떻게 우리가 자신과 남을 다르게 대하고 있는지 〈개입〉의 맹점을 건드린다. 남에게는, 대충-안이하게-무리해서 “닮았다!” 라고 해놓고는, 자신에 대하여는 유일회적이고-고유하고-귀하고-섬세하고-까다롭게-심사숙고하며 “닮았다”에 저항하는 자리.
거기에는 자기 존재를 일반화하지 않으려는 에고의 고집이 작동한다. “닮았다”는 말을 검토하며 〈개입〉의 한 형식이 적발되었다.
(2) 국수와 고명론. 선생님께서는 상대의 말에 고명을 얹는 행위를 말씀하시며, 국수가 〈매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리고 〈매체〉란 ‘인간의 관계를 돕는 것’이라고 자리를 매김하신다. 인간관계라는 지평위에서 매체를 다시 보아야 한다.
(3) 포기하지 못한 환상을 가지고 산다. 더 정교한 이론과 분석을 찾고(한편 주눅도 들면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반(反)-현실을 꿈꾼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인간은 타락을 피할 수 없고 투명한 관계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으니 인간사의 길로 들어서라고 하신다. 그것은 “적당함(度)”을 배우는 일이다. 계제마다 맥락마다 달라지는 중(中)을 치면서 긴절히 응하는 일이다.
덧붙여,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맙시다.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우리의 양심”이라고 하신 말씀에 여운이 남았다.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도우려고 하지 않는 게, 양심이나 윤리일 수 있다. 섣부르게 번져나가는 관심을 단속하고, 내 몫의 책임인 ‘앞가림’을 가장 중대한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순서임을 다시금 새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