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는길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부엌의 수다
“‘수다의 정치학’과 같은 얘기는 전혀 아니지만, 나는 여인들의 수다가 품은 어떤 말의 가능성을 아낀다. 인간의 말은 언제나 정치나 경제 따위가 미칠 수 없는 지경의 흔적과 조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엌에서 엿듣는 그들의 수다는 (운이 좋을 경우) 인간의 대화가 품은 한 가능성의 극점을 시사한다. 모른 척 엿듣긴 해도, 이 여인들의 작은 세계가 그들만의 언어로써 설치한 그 이상한 방호벽은 은근히 남자'를 소외시켜, 나는 일순 외부자로 내몰린다. 그래도 나는 이들의 주변에 서성거리거나 바장이면서 죄없이, 어떤 기이한 평온함의 정서를 매만지면서 엿듣곤 한다. 남자들이 없는 자리에서 이 여인들은 수만 년간 숨겨둔 비장의 화법으로 스스로 공수를 내리는 무당이 된다.” (k 선생님,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약자와 강자의 구분에도 층위가 있습니다. 흔히 여성을 남성에 비겨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지만 이런 구분은 일차원적 구분에 의한 것입니다. 여성의 강함은 일차원성과는 그 층위가 사뭇 다릅니다. ‘사회적’이라는 개념에는 동물성을 넘어서는 인간성을 내함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성(언어성)은 ‘혈연’이라는 유전자의 지령을 넘어 타자와 어울려 살기 위한 과정에서 출현합니다. 그 원초적 매개가 먹거리를 나누는 공동의 식탁에 있습니다. 어울려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공동의 노동’이 근간의 형식으로서 요구됩니다. ‘사회성의 근간을 이루는 공동의 노동을 누가 치르고 있는가?’, ‘공동의 노동을 매개하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를 묻게 되면 가부장의 강함은 일차원적 층위로 미끄러지고, 어울림을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허구의 구실로서 드러납니다. 혼자서는 밥상도 차리지 못하는 ‘강함(실력의 부재)’(으)로 어울림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식탁을 매개하는 말이 ‘부엌의 수다’입니다. 여성의 말을 배우며 진정한 강자로 다시 태어날 남성조의 식탁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