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일회(一期一會)
‘활재당하(活在當下)’를 배웠고 ‘결정에 구성적으로 깃드는 요동’인 ‘놀람’(연암)을 배웠습니다. 실력이 엿보이는 장소(감)(으)로 이동하여 경이(驚異)를 자아내는 일이 공부하는 이가 개입하는 방식인 동시에 현재를 잘 살아내는 일입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를 위해서도 비용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이가 주체로서 외부에 개입하며 정신의 방향성(vector)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타자(성)를 향한 호기심을 지닌 주체는 ‘무아(無我)라는 참회’를 거친 반로환동(返老還童)에 가깝습니다. 분별 없이 주어진 대로 타자를 만나는 아이도 아니고, 아집으로 그득해 타자를 만나지 못하는 ‘자라지 않는 어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회를 거친 아이는 타자를 가려 만나고[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공자], 타자성을 정동과 엮으며 정신의 조형(造形)에 개입하는 ‘지혜와 꾀를 품은 존재’입니다.
일상에서 기억이라 불리는 정신의 작용은 신경계의 패턴을 새로이 구성하는 일입니다. 신경계의 복잡도가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언어(성)의 정세함이 시간성(역사성)을 창발합니다. 신경계의 변화를 위해서는 ‘타자(성)’(이)라는 외부 자극과 ‘정동’이라는 내부 자극을 요구합니다. ‘기억이 감정이고 감정이 기억’이란 말은 이에서 비롯합니다.
공부는 ‘공대할 타자’를 만나 ‘경이라는 놀람’으로 엮으며 ‘정신을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진짜’라는 실력을 지닌 타자(성)를 향해 이동하고 ‘자신을 낮추는’ 경이의 정동으로서 ‘만나고 배우는 일’입니다. 혼자서 하는 공부와는 다르게 어울림의 공부는 ‘어울리며 어긋내고 어리눅는’ 과정 속에 자신의 말과 타자의 말이 동시에 개입하며 시간성과 장소감이 도드라지게 창발됩니다. (이번 식사 메뉴는) 참말로 ‘짜장’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