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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우리 인문학의 길 없는 길
〈역사성의 계보를 타고 온 실존의 인식욕〉. 수년 전 어느 책의 서문에서 내 학문의 성격을 간단히 정리해 본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보아도, 학문이란 우선 역사, 곧 삶의 흐름새라는 생각은 여전히 결연하고, 그 흐름새 속에 새로운 지경(地境)들이 가득 담겨져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내가 또 다른 책에서 글 쓰는 나를 일러 무엇보다도 <역사의 힘에 깊이 찬탄하는 자>로 묘사한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학문성조차도 역사성의 하위에 두려는 내 일관된 태도는 앎의 권리 원천이 오직 삶의 터와 역사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내용과 인식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내 학문이 진위 구별의 강박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된 것은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인식과 해석을 넘어 성숙과 해방의 지경을 개척하는 것은 근년의 내 지속적인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내 학문의 축이 <정확히 아는 것>에서 <깊이 걷는 것>, 혹은 〈잘사는 것>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앎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그 의의를 희석하려는 취지가 아니다. 다만 앎도 삶도 아닌, 앎과 삶 사이의 통풍을 강조해야 한다는 경계 의식(境界意識)의 항의다. 최근 내가 주력하고 있는 인문학의 복권과 그 일리지평(一理地平)을 열기 위한 작업도 이 통풍에 대한 문제 의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줄기차게 우리 학문의 식민성을 캐고 드러내고 고발하고 반성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 고발이 높아지고 그 반성이 깊어지면서 논증에서 설득으로, 다시 설득에서 항의로, 또 다시 항의에서 질책으로 글은 그 색채를 바꾸어갈 것이다. 우리 인문학이 고심해야 할 이 시대의 식민성 문제란 과거의 중국이나 일본, 혹은 현재의 구라파나 미국이라는 나라들과의 종속적 대외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논의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미 그 종속성이 우리 자신의 삶과 앎을 서로 소외시키고, 속으로부터 우리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내면의 문제로 체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힘있는 나라의 운 좋은 학인들은 도구적 이성과 체계의 논리가 자신들의 생활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다고 떠들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식민화될 만한 기초적인 생활 세계조차 없다. 이미 우리는 남의 생각과 남의 집 속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다. 눈을 씻고 찾아보라. 책의 안팎에, 교실의 안팎에, 대체 우리의 것, 우리 역사의 터를 거쳐서 법고창신(法固暢新)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바람을 맞으면서 키워온 것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남아 있는가.
탈식민성의 화급한 과제가 인식과 진위의 공시성을 넘어서 역사성을 지향하는 태도와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릇 과거를 더듬는 뜻이란 지금의 지형과 그 성격을 의심해 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변혁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는 것이 아닌가.
소위 <글쓰기 철학〉은 최근 수년간 주력하고 있는 내 학문의 중요한 한 갈래다. 더 이상 언어를 단순한 도구나 기호로 여기지 않듯이, 글쓰기는 더 이상 의미와 진리로 통하는 터널이 아니다. 터널은 <빈 것>이지만 글쓰기는 <꽉찬 것>이기 때문이며, 철학의 매개, 혹은 그 결과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가 가장 심각하고 심오한 철학적 지경 그리고 성숙과 해방의 지평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본격적인 글쓰기 철학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이 방면의 내 생각이 아직 미진한 탓도 있지만, 우선 글쓰기의 역사학, 정치학 그리고 심리학적 배경을 밝힘으로써 우리 인 문학의 탈식민성을 다스리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는 이 책의 한 흐름은 탈식민성의 숙제를 글쓰기의 층위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지금의 우리 인문학도들이 담당해야 하는 과제는 이중적이며 그 어느 것도 만만치 않다. 간단히, 그것은 대외 종속성을 줄이고, 열린 주체성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의 자생력을 높이는 일 이다. 다시, 그것은, 우리 인문학을 포함해서 우리의 정신문화사에 부과된 여러 질곡의 역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동시에 그 깨침을 발판으로 삼아 지금의 학문 조건을 책임 있게 다듬어가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현실을 아직도 틀어쥐고 있는 봉건성과 섣부른 외제 탈근대성을 동시에 극복하는 일이며, 우리의 터와 역사에 알맞는 근대성을 내면화시키는 일이다. 이 과제는 지난지사(至難之事)이지만, 우리 정신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숙업이며, 이 책은 그 숙업을 향한 작지만 구체적인 발걸음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논의에서 계속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복잡성>이 바로 여기에 개입한다. 우리의 과제가 워낙 이중적이듯이 복잡성 이라는 개념의 역할도 이중적이다. 그것은 <우리 학문의 대외적 종속성이 우리 자신의 삶과 앎을 서로 소외시키고 속으로부터 피폐하게 만드는 내면의 문제로 체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복잡성의 철학>이란 우선 우리 삶의 현실을 제대로 보자는 취지이며,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언어와 스타일로 읽어내자는 줏대이며 배려이다.
우리 삶의 일상이 내는 소리를 경청하고 제대로 반응하는 일은 곧 우리 학문의 주체성과 자생력을 회복시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글쓰기의 철학과 그 방법은 이 첫걸음의 구체적인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샅샅이 어루만져주는 <잡된 글쓰기>는 내가 <일리>라고 부르는 다양한 이채의 맥(脈理)을 좇아가면서 이루어진다. 인문학의 일리지평이란 진리의 독선과 절대주의를 경계하면서 아울러 무리의 무책임과 허무주의에도 탐닉하지 않으려는 감수성의 해석학적 세계이다. 진리의 빈 궁궐 그리고 무리의 가건물을 빠져나와 다양한 일리들로 뒤엉킨 삶의 모습을 솔직하고 세세하게 파악하고 그 이치의 길을 좇아가면서 성숙과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동참할 학문의 길이요, 우리 인문학의 길 없는 길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1994-1995년 사이, 서울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 절치액완(切齒扼脘)과 융통무애(融通無碍)의 틈에서 배회하던 중에 씌어졌다. 총 8편의 글 중, 「논문중심 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문학과 사회》, 1994년 가을), 「집짓기, 글쓰기, 마음쓰기」 (《비평건축》 1호, 1995년), 「글쓰기, 복잡성, : 『하얀전쟁』과 『이방인』」(《오늘의 문예비평), 1994년 봄) 그리고 「원전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부산대학교 「문정포럼』 강연 원고, 1995년 봄)를 제외하면 모두 이 책을 위해서 따로 씌어진 것이다. 글을 쓰는 때와 책이 되어 나오는 때가 다르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시간성의 학문인 인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나 시간의 틈으로 인한 생각의 틈, 그것 자체마저도 우리가 보듬어야 할 학문의 한 켜라면 어쩔 수 없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여러 고마운 분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이왕주 교수, 김정근 교수와 부산대학 문헌 정보학과의 여러 연구원들, 김보현 교수, 구모룡 교수를 비롯한 《오늘의 문예비평》의 여러 동인들, <한국인문학연구회>의 지기들, <해석과 비판을 위한 모임>의 여러 동료들 그리고 그 외 낱낱이 밝힐 수 없는 여러분들의 도움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내 학문의 심지를 세우는 촛불로 삼고자 한다.
문득, 윤노빈 교수님, 김홍호 선생님 그리고 돌아가신 변선환 박사님의 기억이 새롭다. 아, 왼발이 땅에 닿았는가 했더니 오른 발이 허공에 떴구나.
1996년 11월
전주 남고산성 그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