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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들의 변명 : ‘작품으로 하는 글쓰기 

책머리에


이 조그만 책으로 시류를 거슬러 무슨 대단한 물꼬를 트는 일을 욕심내자는 것도 아닌데, 벌써 양쪽으로부터 힐난과 시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작품 평론도 아니라느니, 그렇다고 철학 논문도 아니라느니, 편가르기 좋아하는 이들의 트집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난 따위보다 그 비난이 자리잡고 서 있는 저 완강한 고정관념이 더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작품에 대한 글쓰기' 가 아니다. 애초에 특정한 작품이나 특정한 글쓰기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것은 평론, 저것은 논문, 이것은 허구, 저것은 사실, 이것은 문학, 저것은 철학 등으로 영역을 나누고 틀을 고정시키며 완결된 가치 서열을 고집한다면 영영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품과 장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든 담론들은 결국 같은 처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요컨대, '작품에 대한 글쓰기'의 경우, 이것은 피하기 어려운 숙명처럼 보인다.

이 책이 추구하는 것은 '작품으로 하는 글쓰기' . 그것은 작품 뒤에 숨겨지기를 원하지 않는 글쓰기다. 우리는 작품들에 대한 권위 있는 판관이기를 원하지도 않지만 그것들 뒤에 숨은 얼굴 없는 목소리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작가의 명성을 권위의 척도로 삼지도 않았으며, 위대한 이론의 후광을 진리의 징표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이 책의 저자들은 누구이며, 대체 그들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글쓰는 자들이다. 이 책의 화제로 선택된 작가들과 더불어 글쓰는 자들, 그 손가락들이며, 그 손가락들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통해서 작품과 나란히, 그리고 작가와 나란히 서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자들이 누려왔던 '메타' 라는 그 특권의 공간을 잠시, 그리고 겸허히 유예한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다고 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반드시 물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물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가령 물 위의 삶을 꿈꾸는 모험과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베네치아에 있는 저 현란한 물의 미로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더러 들리는 철학과 문학의 과장된 불화는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삶에서는 기왕 만나고 있는데, 왜 글에서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가. 그 배당된 자리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운명적 해후'의 거창한 의식을 마련 하지 못해서인가. 만약 이 불화가 게으름이나 타성, 혹은 자존심 같은 조잡한 원인에서 생긴다는 소문이 나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인문학도들의 책임일 것이다. '작품으로 하는 글쓰기'는 아직 그러한 책임을 만족스럽게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책임의 강박에 직면하고 그 긴장을 좀더 정직하게 버티어내려 했을 따름이다. 결국 그러한 몸부림으로는 그 책임의 현장에서 우리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작이란 언제나 그런 게 아니던가. 그리고, 인문학이란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던가.

이 책은 1995년 봄부터 1996년 가을까지 부산일보의 문학 속의 철학' 란에 매주 연재한 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 파격적인 기획의 최장기 칼럼으로 여러 독자들과 속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또 지식인의 속뜻을 새롭게 새겨볼 수 있었던 그 기회가 성사되는 과정에는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주정이 화백, 부산일보의 이광우 기자, 그리고 고() 정학종 전문화부장에 대해서만은 굵은 방점을 찍어서라도 특별한 사의를 표하고 싶다. 부산대학교의 홍우철 교수와 김정근 교수, 그간 여러 형태로 관심과 애정을 표시해준 여러 독자들, 그리고 책으로 엮어준 문학과지성사, 특히 안수연씨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973월 글쓴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