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책이었는데, ‘방귀에 색깔이 생긴다면’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자타의 배출물을 식별하게 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기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방귀’야 무해한 편이니 잠시 당황스럽긴 해도 크게 문제가 될까 싶다. 하지만 그 외의 배출물, 몸 밖을 나가려는 말, 리비도, 에고, 정념같은 것에 색이 생겨서 나온즉 식별하게 된다면 어떠할까? 볼 수 있으니 조금 더 ‘조심’할까? 그런 정보를 감당하겠는가? 시력을 퇴화시키거나 색을 조작하는 산업이 성황 할지도 모르겠다. 엉뚱한 공상일 뿐이지만 마저 얘기하면, 그렇게 생긴 ‘조심’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조심’이란 어떤 비평의 기억일 테니.
회명재 거실. 숙인들이 쉬고 있는 사이 작은 가습기에는 수증기가 거실 등에는 빛이 서린다. 저 사물들이 제 몸 밖으로 나가는 형식을 생각하여 본다. 중력을 거슬러 ‘그림자보다 빠르게’ 나와 돕고 잊혀 있는 형식이랄까. ‘수증기’ 혹은 ‘빛’처럼, 불가능한 존재의 변환을 모색하는 공부(功扶)이지만, 실상은 ‘조심’을, 비평의 기억을 가시처럼 몸에 새기는 지난한 과정이랄 수 있겠다. 스스로를 훈육해야 하는 성인(成人)의 공부는 그렇다.
충실히 통과했다고 해서 어떤 소식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의 걸음을 배우고, 이 걸음의 가치를 보증해 주려는 어울림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 이것이야말로 선명하다.
“이론이 몸을 통과할 때 이론은 비평이 된다. 비평이 자기개입의 흔적을 몸의 가시처럼 기억하고 있을 때 비평은 지혜가 된다. 지혜가 지성을 아득히 초과하며 四隣에 응(답)할 때 지혜는 도움(구원)이 된다.” (k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