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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몸 #등가교환 #주고받기 #욕망 #체제 #불화 #공부)



자본화된 몸

등가교환에 길들여진 자본제적 몸의 체질과 욕망의 배치를 스위치를 끄고 켜듯 상황에 맞게 선택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물건을 고를 때 동원되는 합리, 효율, 마음의 알뜰함이 인간을 대할 때도 적용되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쇼핑을 할 때 물건을 대하는 마음과 일상의 사람/인격체를 응대하는 마음이 때에 맞고 분별있게 기용되기는 쉽지 않다. 물건 고르듯 사람을 보게 마련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새 ‘물화’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저항

물건을 교환하며 서로에 대한 존경과 은혜를 주고 받았던 원시공동체사회 구성원이 가질 법만 순진하고 해맑은 미소를 내 얼굴에 복원해 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현대인의 냉혹하고 지독한 합리성을 조금은 내려놓는 연습을 해본다. 의지로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억울하고 불합리한 손해에 초연해지는 시도를 한다. 사람을 볼 때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 출신, 간판을 애써 외면해본다. 그저 한 존재로서 인간을 대하고 경험하는 감각을 의식적으로 되살려본다. 몸은 이미 합리와 효율이 지배하는 경제동물이 되어버렸는데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 좋은 설교를 듣는다 해서, 절에 가 마음수행을 한다고 해서 이 자본화된 체질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당위, 계몽, 윤리, 훈계는 내 몸에 베인 자본제적 합리성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어떤 면에서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덜 합리적이면, 인간적인(humane)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게으르거나 분별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다.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모색하고자 가족까지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등의 개인 차원의 어설픈 체제 불화의 시도는 자칫 체제 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체제와 정면으로 불화하면서 체제 부적응자로 낙인찍히지 않기는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쉽지 않다. 같은 산에 있더라도 누구는 무림의 고수가 되지만, 누구는 대중의 눈요깃거리 '자연인'이 된다.


화폐 - 착취의 대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자본주의 체제에 들어와 있는 이상,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경제활동 내에서 구조적으로 타인을 어느 정도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경제에 편입된 이상 유형이든 무형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화폐로 환원시키는 버릇을 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인간을 대할 때와 상품을 대할 때를 나름 ‘인간적으로’ 분별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 섞인 믿음이 있을 뿐이다. 내 주변의 것들은 이 "내용 없는" 단일 기준(화폐)에 의해 표준화되고, 몰개성화된다. 회사에서 열심히 자신을 소외시키고, 타인을 착취하여 번 돈으로 가끔 불우이웃을 돕고 후원을 하기도 한다. 직접 돕지는 못하고 화폐를 경유해서 도와야 한다. 이로써 나의 착취는 합리화되고 심지어 신성해진다. 그리고는 그 정도면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소심한 격려를 한다. 체제가 개인에게 허락한 최선의 소시민적 윤리다.


실용적인 대안

어쩌면, 차라리 겉으로 표상된 등가교환 행위라도 성실하게 잘 수행하는 것이 개인의 체제저항에 대한 무력함과 회의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최선의 방책이 아닌가 싶다. 분명 거래인데 거래가 아닌 듯이 하는 인간관계가 때론 더 애매하고 불편하다. 그 관계가 친구든, 연인이든, 부부든, 심지어 가족이든 말이다. 거래라는 표현이 다소 비정하고 차갑게 들리지만 이 명백하고 노골적인 주고-받기조차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최소한 받은 만큼은 주어야 하는데 그 만큼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는 합리적인 '거래'를 하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애초 계약에 없는 사랑이나 우정을 찾고 있으니 출처 없는 비합리적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무력하게 냉소하거나 어설프게 저항하기보다 기왕 체제 안에서 벗어날 실력과 용기가 없으면 그 안에서 통용되는 나름 합리적인 프로토콜(protocol)을 성실하게 준수만 해도 삶이 한결 깔끔해진다. 적어도 개인이 감당하지도 못할 인간됨의 ‘의미’라거나 ‘당위’ 같은 것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


체제와 불화할 수 있는 힘

물론 본인이 실력과 깜냥이 되면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체제를 전복시키거나 바꾸지는 못해도 체제 변두리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지속가능한 생활양식, 안락한 제도 밖으로 소외되어도 이를 버텨낼 사유의 힘이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실력도 없고, 자기 개념이나 철학도 없는데 내면에서는 체제와의 불화를 ‘꿈’꾸며 돈키호테식 ‘비장미’만 키운다면 이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주고-받기의 변화

책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듯이 개인의 변화는 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결국 몸이 변해야한다. 실력은 곧 '몸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내 습관, 반응 패턴, 생활 양식이 내 까르마이고 운명이다. 내 몸의 운용을 들여다보고 내 욕망을 지긋이 응시하여 기민하게 내 몸에 맞는 삶의 양식을 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주고-받기의 양식 하나를 바꾸어도 좋은 몸으로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인류가 '개인(individual)'으로 살아온 역사가 길지 않고, 더구나 '개인적 이득(personal interest)' 혹은 '사적 소유(private property)'의 개념 또한 근대의 산물임을 기억할 때, 인간의 본성이 합리와 효율로 대변되는 이기심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음을 새삼 발견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쌓고, 쟁이고, 소비하는 몸에서 내게 주어진 것을 누리고, 나누고, 절제하는 몸으로 이행하는 연습 속에서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할 수 있는 작은 실력이 싹 틀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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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가온 2021.05.20 16:37
    ‘자본’이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그 적이 필요하겠습니다.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거리거리마다 괴물이 먹고 뱉어 놓은 앙상한 뼈들이 즐비합니다. 깊이든 약하게든 한 번 물리면 돌아오지 못하는 게 좀비이듯, 이미 오래전부터 그 씨로 잉태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다고 뭐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글을 읽고 이러한 패배적 감수성을 지긋이 눌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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