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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 파스타와 'V'>

'응해서 (말)하기' (단보선생)

공부길은 산책이다. 집이라는 돌아갈 곳을 확보하고 잠시 떠나온 여행과 다르다. '자본과 창의적 불화'를 하겠다는 것은 자본의 체계로부터 자신의 몸을 온전히 유염시키지 않겠다는 간단없는 길항의 행위다. <장숙>이라는 장소로 '몸을 끄-을-고' 나온 것은 자본이라는 체계를 필요한 만큼 선용하되 꺼들리지 않는 '서늘한 이방인'이 되겠다는 매체 정치의 선언이었다. 한마디로 '자본으로부터의 배수진(背水陣)'을 치기 위한 결단이었다. 터치 한 번으로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즉각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 편리함을 내려놓고 불편을 찾아 아름다운 공동체를 꾸릴 수 있다는 환상은 버린 지 오래다. 인간(들)은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 자신이 맛본 물리적 편의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성질은 몸이라는 물질이 지닌 '최소 작용의 원리'에서 연원한다. 


언어의 출현은 사회성과 동시적이고 동률적 사건이다. 언어는 생존을 위해 인간을 동물적 본능을 넘어 공동체로서 묶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자본의 언어도 인간을 묶는다. 그 영향권은 실로 막대하다. 태어난 공간도 시간도 다른 이들을 빠짐없이 묶으려면 그 언어는 일차원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가장 기저의 본능이 아니고서는 모두를 묶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국경 없는 세계화를 향한 노력과 그를 매개하는 언어의 일차원적 퇴보는 서로 맞닿아 있다. 수치라는 '값'에는 성별도 나이도 국경도 문턱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역설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역설이 부른 부메랑에 맞서기 위해 모인 공동체는, '자본의 언어에 길항하기 위해 모였다'는 그 동인 자체로 인해 자폐적 한계를 낳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수치화에 반대한다'는 거대한 합의이자 슬로건은 서로의 차가운 타자성(개별성)을 대면하기보다 '반(反)자본'이라는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안전한 온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타자(성)와의 대면이 부르는 물리적 마찰이 아니라 '우리는 다르게 사는 정의롭고 깨어있는 사람들'이라는 에고의 자폐적 확장에 불과하다. 이 '공동체 아닌 공동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은 마찰조차, '이념적 순수성'에 때를 묻혔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견디지 못하고 내부 분열(정통 대 이단, 파벌 싸움)로 해체된다. '언어'만으로는 자본의 언어를 뛰어넘을 수 없다. 자본이라는 체계와 불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생태, 연대, 평화, 가치 등) 역시 결국 신체적 마찰이 제거된 또 다른 '기호이자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응하기'라는 몸의 마찰이자 공동의 노동을 생략한 채 언어로만 집단을 유지하는 경우, 하루는 종일 토론하고 다른 하루는 서로의 사상을 검증하는 '자폐적 언어의 과열 현장'이 된다. '생각의 자발성'은 결코 생존의 '이중 구속'이라는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 체계와 결이 맞지 않아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자발적 선택이긴 하다. 그러나 '퇴로가 있는 생각의 자발성은 물리학적 마찰을 견디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다르게 살기 위해 모였더라도 타자와의 신체적 마찰(불편함, 의견 충돌, 노동에 의한 육체적 피로)이 극에 달하면 참가자의 몸(뇌)은 '비용의 최소화'로 기운다. '언제나 변명의 기회는 결렬(決裂)의 순간'(단보선생)이 되며, 다시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차를 타고, 본래 자신이 나왔던 자본의 온실로 되돌아간다. 존재론적 배수진으로서 몸을 끄-을-고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선택하고 소비하기 위해 잠시잠깐 여행을 나온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행자가 모여든 여행지는 불편이 현실화되는 순간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물리적 · 존재론적 장치가 부재한다. 이는 탓할 일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위험이 부재한 실내화된 공간에서 공동체의 필요성이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환경에서 부러 불편하게 사는 일은 강요될 일은 아니다. 자본에 유염되어 편하게 살기보다 자본과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불편한 삶은 자신의 역사성이 이끄는 존재론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장숙은 생활양식파(派)'(단보선생)다. '다르게 살기' 위한 토대로서 생활양식의 변화는 불가결하다. 생활양식의 변화는 타자성의 개입을 요구하기에 필연적으로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기연이나 사고가 아닌, 공부는 타자성에 노출되는 매체 정치를 요구한다. 몸이라는 끌개는 타자성이 개입하지 않으면 버릇이라는 마음대로(하던 대로) 작동한다. 편의성이 모짝 삼킨 '겹침을 위한 제도적 틀'을 현재적으로 전유하지 못하면 파편화된 개별성을 통합하는 '성숙'의 길도, 공동체의 가능성도 사라진다. 타자와 응하기 속에 이뤄지는 '몸의 마찰'과 '예측 오차의 상쇄'라는 생물학적  · 물리적 기전을 삶이라는 일상 속에 전유하는 구체적 시도들이 요구된다. '약속', '복종', '낭독', '연극'이라는 자발적 틀과 '겨끔내기', '현복지'를 매개로 한 '공동의 노동' 말이다. 약속, 복종, 낭독, 연극을 매개로 '다르게, 쉼없이'(단보선생) 행하고, '현복지'와 겨끔내기를 기반으로 함께 어울려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며, 사물을 옮기는 공동의 노동으로 나아가는 일은 감각으로서 유입되는 타자성에 맞추어 자신의 운동을 조율하는 '감각-운동'의 되먹임으로서 '응하기' 실력을 키우는 일이다. '응해서 (말)하기'(단보선생), 그것이 공동체로 향하는 시작이자,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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