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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행위는 내겐 기피 행위다. 부러 기피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이 말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도 동학들의 수고를 사진으로 담지 못한 미안함을 전하기 위한 변명의 말이다. 이 변명의 말도 어떤 자극이 기반이 돼 '찾아온 말'이다. 변명을 옹호하자면, 인간 행위의 시작은 '의도'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시작은 '자신도 모르게' 외부나 내부의 자극에 의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행위는 '감각-운동'의 되먹임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나는 공부 끝에 생각도 묵음의 언표 행위라고 정의했다. 물론, 일상의 언어로 살피면 삶은 의도대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어 보이고, 계획대로 실천되는 것처럼 체감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도를 의도할 수 없고, 계획을 계획할 수 없다. 의도나 계획은 말로써 이루어지고, 발화가 이루어지든 생략되든 말로써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생각, 상상, 묵독 등)은 언표 행위를 매개하므로 오직 '감각-운동'의 되먹임만 있을 뿐이다.


많은 작가들이 '무의식적 글쓰기'를 얘기하고 '말이 찾아온다'라고 얘기한다. 내겐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글쓰기나 말하기도 모두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작품의 첫 번째 독자'라는 흔한 말에서부터 '작가의 소멸'을 말하는 블랑쇼까지, 이것은 행위에 의도가 개입할 틈이 없다는 것을 선취한 정신적 존재들이 뱉어낸 말이다. 인간 행위의 시작은 '알면서 모른 체하기'(k 선생님)로 이루어진다. 다만, 각자가 모시고 있는 신은 자신의 역사성에 의해 갈릴 뿐이다. 이 신들의 일은 인지의 영역이 아니므로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다. 좀 더 적확히 표현하면 '알(고 바꿀) 수 없다'. 오코너의 글도 '알면서 모른 체하기'를 매개로 쓰였다. 그녀 스스로도 얘기했을 뿐더러 앞선 논의에 의하면 당연한 말이다. 그녀의 작품의 첫 번째 독자도 그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글을 쓰고 난 후 읽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 적중 여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독자의 독서는 모두 번역이다. 이것은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그녀의 문학을 얘기하는 문학론도 일종의 해석이다. 그녀가 말한 관념론적 해석 말이다. 그녀가 글을 쓰게 만든 매체적 조건과 해석하는 시점의 매체적 조건은 같을 수가 없다. 매체적 조건으로서 그녀의 몸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이 문학적이라면 그녀의 문학론은 비문학적이다. 그녀가 말하는 '카톨릭적 은총'은 그녀가 그녀의 문학을 관념론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 동원되는 수사다. 그녀는 학부시절 사회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영문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 아이오와 대학교 작가 워크샵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신비평 및 정밀 언어학을 수련한다. 시각 방언도 이때 배우게 된다. 또한, 그녀의 친필 메모에 드러났듯이 테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 현상> 등의 저서를 읽고 진화생물학과 우주론 서적을 탐독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서간집 <The Habit of Being>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지인들과 진화론 및 생물학적 물성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신-토마스주의자들로 이어지는 텍스트를 읽고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오코너가 인간의 정신과 지성, 그리고 관념을 극도로 경계한 이유는 그녀의 역사성에 의해 매체학적으로 구성된 결과다. 이런 그녀의 성향과 기질은 그녀가 만난 이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결정된 것이다. 그녀 또한 신체-매체학적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 관념을 완전히 걷어내면 일차원적으로 미끄러지고, 관념이 과잉되면 그녀가 강조한 물리적 실재로서 '육화'를 차단해 버린다. 그녀의 무의식적인 글쓰기는 그녀의 해석에 의하면, 육화에서 멀어진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카톨릭적 은총'이라는 폭력을 가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녀가 말하고자 한 바는 현대 철학 용어로 풀면 '에고의 과잉'과 '타자성의 개입'에 의한 그 파산에 대한 현상학적 묘사에 가깝다. 현대 문학 비평과 구조주의/실존주의 시각에서는 이런 해석이 더 정밀하고 객관적인 진단이다. <속속> 수업 중에 그녀가 가진 감각과 재능에 비겨 그녀의 문학론이 '신학적 언어에 갇혀있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이에서 연원한다.


나는 이를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알면서 모른 체하기'를 매개로 작성한 작품에 대해 해석을 가하면서 생긴 언어적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로 본다. 오코너가 살았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카톨릭으로서, 스콜라주의적 교육 환경과 그녀가 습합한 학문의 이력을 살피게 되면 그녀로서는 인간 내면의 자폐성과 오만이 외부의 거친 타자성에 의해 부딪혀 무너지는 구조적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프레임이 바로 '카톨릭적 은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문학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한 '카톨릭적 은총'에는 그녀가 만난 사회학, 진화생물학, 신비평, 기호학, 행동동물학 등이 녹아있다. 이에 반해, 그녀는 1940~60년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자아/에고(ego)의 자폐성과 타자(The Other)의 이질성에 관한 현대 정신분석학과 현상학적 철학을 접하지 못했다. 시기적으로도 사후에나 보급되었고, 오코너 자신의 지적 경로와 맞지도 않았다. 언어만 달랐을 뿐, 구조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다른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오코너가 '라캉의 실재'나 '레비나스의 타자'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고, '은총'이나 '신비'라는 카톨릭적 어휘를 빌려 써야 했지만, 그녀가 단편에서 묘사한 역학 구조는 이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소설로서 문학적으로, 감각적으로 드러냈기에 그 표현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 ?
    rbigrit 7 시간 전

    "각자가 모시고 있는 신은 자신의 역사성에 의해 갈릴 뿐이다."
    "언어만 달랐을 뿐, 구조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다른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 표현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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