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인식은 이성적일 수‘만’ 없다. 이성적 존재는 ‘기원을 잊은 풍경’으로서 일종의 허구다. 이성적 존재는 정동을 기반으로 타자를 엮는 감성적 존재를 잊어야 존립 가능한 불가능으로서의 지평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물질이라는 필연[可知]과 정신이라는 우연[不可知]이 혼효된 존재다.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는 몸을 지닌 채 응하기의 역사라는 형식에 의해 조형되었고(게놈) 조형될 것(신경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은 ‘역사화된 축중’으로서 불변이라는 ‘수학적 축중’과는 다르게 몸과 맞물려 변환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응하기는 필연(물질‘만’)도 우연(정신‘만’)도 아닌 개연(차원전이)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생명이라는 정신적 존재는 반복해 드러나는 형식의 겹침(패턴)으로써 파악될 수밖에 없다.” (독하)
정신의 초월성은 측정의 부재에 있다. 즉, 불확정성을 띤 양자적 특성에서 연원한다. 정신적 차원의 기록은 동시 유입이라는 양자적 패턴의 중첩과 얽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였다. 외부 물질의 패턴에 의해 생성되는 이미지 감각질과 몸의 변화라는 정동 감각질은 물질성에서 기원해 대체로 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언어로 구성된 감각질은 그 기원에 물질성이 부재해 감각질 자체에는 물질적 의미가 부재하지만 이 덕에 물질성을 지닌 감각질과 언표(에 동반된 듣기)를 통해 임의로 얽힐 수 있다. ‘사과’라는 감각질은 하나의 청각 감각질이지만 다양한 사과 품종과도 엮이고 인간의 행위에 용서를 비는 행위[謝過]와 용서를 해주는 행위[赦過]와도 엮인다. ‘기분이 좋다’라는 언표는 어떤 양태를 띠는 다수의 정동 감각질을 하나로 묶어 얽힌 문장이다.
언어를 정세히 사용하려고 노력해도 이런 중의성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이를 일러 언어가 가진 축중도(縮重度, degree of degeneracy)라고 불렀다. 언표 행위를 하게 되면 언어에 축중된 다수의 감각질들이 항용 상상과 같이 ‘표상’되지 않는다. 일례로 ‘사과는 맛있다’라고 언표한 경우, 부러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으면 표상이 부재한 채 언표가 가능해진다. 인간만의 특유한 초월성의 비밀은 여기에 있는데 표상되지 않은 불확정성을 띤 감각질들이 중첩과 얽힘이라는 양자적 특성에 의해 정신적 차원에서 부지중에 개입하게 될 가능성이 열린다. ‘에고가 소비한 것은 무(초)의식이 돌아보지 않는다.’(k 선생님) 경험에 의해 중첩되고 얽힌 채 정신적 차원에 기록된 패턴을 기반으로 시공간과 자타를 초월하는 정신적 차원을 매개로 사린에 개입하게 되는 셈이다.
부지중에 작동하는 정신적 차원의 개입은 시공간 뿐만 아니라 자타를 넘어선다. 물론 시공간과 자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측정의 부재라는 정신적 상태를 쌍방1)으로 요구한다. 이미 다세포 동물이 단세포를 넘어 초월적 소통을 이루는 하나의 방증이다. 단세포의 정신에는 측정이 부재하니 초월적 소통에 알맞춤한 조건이 된다. 생명의 기원은 동일한 모세포를 지녀 몸이라는 형식에서 이미 일부 겹침을 이루고 있다. 언어 감각질에 묶인 이미지와 정동의 감각질도 그 형식 면에서 동종의 개체간, 그리고 이를 넘어 다른 종과도 일부 겹침을 이룬다. 언어를 제외한 감각질은 물질성에 그 기반을 두기에 형식의 겹침이 부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패턴은 고정된 형식이 아니며, 패턴의 겹침에 의해 새로운 패턴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패턴은 반복된 겹침에 의해 돋을새김된다.
‘개연’을 말하고 ‘신은 몸이라는 주사위를 던진다’고 말한 것은 생명이 ‘역사화된 축중’이기 때문이다. 몸이 내함한 불확정성은 정신의 창구다. 몸의 변화는 불확정성이 지닌 축중도(확률 분포)에 의해 기댓값이 바뀌면 뒤따르기 때문이다. 몸의 변화를 위해 매체 정치를 통한 메타화를 말한 사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의 축중도를 바꾸는 길은 반복된 행위 뿐이다. 앞서 언어의 축중도를 얘기했지만 물질을 기반으로 구성된 감각질은 임의로 바꿀 수가 없다. 빨강은 빨강이고, 개소리(멍멍)는 개소리(멍멍)이며, 쓴 맛은 쓴 맛이고, 지린내는 지린내이며, 뜨거운 것은 뜨거운 것이다. 물론 몸이라는 내부 상태에 의해 감각의 민감도는 달라질 수 있지만 패턴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언어가 출현하기 전의 오감은 물질의 패턴을 잡아채 타자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
이를 인지하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바꾸는 것이 공부다. 바꿀 수 있는 하나가 언어이며 다른 하나가 응하기다. 물질의 패턴에서 기원하는 감각질(표상과 정동의 패턴)은 바꿀 수 없다. 언어를 바꿔 표상과 정동의 패턴을 드다루며 행위 지표를 바꿔냄으로써 종내는 응하기로서의 생활 양식을 바꾸는 것이 공부다. 그 생활 양식이 정세해지면 미(美)를 이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행위를 바꾸기 위해서는 행위 지표의 변화가 필요하고, 행위 지표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복된 행위를 요구한다. 이 딜레마로 인해 에고에 잠식된 정신적 존재는 변화가 불가하다. 그렇기에 변화는 스스로 불가함을 인지하고 타자로 나아감을 요구한다. 바꿔 말하면, ‘나보다 더 큰 나’를 위한 공부는 타자로서의 형식을 요구한다. 형식이라는 강제[勉強]가 없으면 공부도 불가능하다. 공부가 타자성을 내재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부를 면강[べんきょう]이라 부른다.
매체 정치를 얘기한 사유는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개입하는 악3)을 줄이기 위해서다. 앞서 언어의 축중도를 매개로 초월적 소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말하였다. 개연을 말한 것은 언어에 맞물리는 감각질은 자신의 경험이라는 행위에서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전한 필연(물질)도 우연(정신)도 아닌 개연(물질과 정신의 상호 개입)을 말한 것이다. 언어의 축중도에는 자신의 역사화된 경험(감각질)에 의거하여 초월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맞물린다. 삶의 이력이 역사화된 축중을 통해 몸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게놈은 선조들의 삶으로서 역사화된 축중이며 신경망은 개체의 삶으로서 역사화된 축중이다. 억겁을 거쳐 선조들이 이룩한 계통발생적 축중도 개체발생적 축중을 통해 메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공부다. 인간성이라는 우회로를 트는 ‘기본기’가 호흡에 의념을 두는 것에 있으며, 이 우회로의 기본기가 일상의 실력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 ‘경행’(k 선생님)이다.
(정)신은 공평하다. 선악도 시비도 도덕도 없다. 정신의 벡터를 통합으로 말하고 이에 반하는 정신적 존재의 멸종 가능성을 얘기한 사유가 정신적 존재가 조화와 균형과 어울림에서 벗어난 행위로서 정신적 차원에 양자적 패턴을 기록하게 되면 부지중에도 악을 행할 가능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물질계에 우연으로 비춰지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며 인간의 인지로 측정이 불가한 정신적 차원의 개입에 의한 것이다. 우연은 우연이 아닌 역사화된 축중에 의해서 개연으로서 이루어진다. 생명의 역사가 응하기의 역사가 만든 정신의 양태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행위를 가려 행함으로써 정신적 차원의 통합에 기여하는 패턴을 기록하는 일이 자타를 돕는 일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그런 것이며,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공자의 말씀도 그런 것이다. 통합을 향하는 정신의 벡터에 일말의 도움이 되는 정신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일, 그것이 공부하는 이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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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말하는 쌍방은 시공간을 초월한 소통의 대상이기에 자타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미래(과거)와도 초월적 소통의 쌍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진화사적으로 몸피가 불어난 동물의 출현과 맞물린 감각 기관의 출현은 세포 단위의 미세 자극보다 먹고 먹히는 타자를 분별하는 것이 생존에 더 중요하기에 공진화한 것이다.
3) 여기서 악은 정신의 벡터인 통합을 어긋내는 개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