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빈
19세기 중반 이후로 자연과학은 현상을 연구하고 법칙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신과학은 인간의 행위 및 의지나 가치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자기만의 고유한 설명의 형식을 갖춰야합니다. '설명을 할 수 있는가'를 1순위로 내세우며 선생의 미덕으로 보기도 합니다. 준비가 되어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신뢰' 가 있다면 준비가 되지 않아도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부분이 있어야 설명이 되고, 설명을 해가면서 생기는 정신의 가능성이 있음을 단보 선생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설명을 할 수 있는가를 떠나 '나에 대한 신뢰'의 여부는 공부를 해나가는데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내부의 저항과 두려움을 끊어내고 '나보다 더 큰 나'에 대한 신뢰의 형성으로 정신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것을 다짐, 다짐합니다.
2. 유ㅅ진
우리는 항상 기분에 젖어서 산다.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어떤 기분에 젖어있는 감정적 상태에서 내린 판단을 이성이 수습하거나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이것은 내가 어떤 기분(정서) 속에 놓여있는가를 이해하는 것, 나의 일상을 좌우하는 기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선생님께서 공부하는 사람은 일정한 기분 속에 존재하여야 하며, 그 기분이 없는 것은 공부가 안된 것이고, 기분이 바뀌는 것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라 하셨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세속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살게 하며 내가 정한 길로 가게 하는 기분이 있는가’ 하고 물으신 것에 대해 길게 품고 헤아려 보아야겠다.
3. 숙비랑
“공부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으로 하기 때문에 빠르게 진화할 수 있는 맥락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사람의 증상적인 자아 형성이 있다는 거지요.”(단보선생)
4. 지린
張混(1759~1828)의 「悟養生」의 맨 끝 행, "喜怒好惡當之則不發"에서의 "不發"의 "發" 한 자에서,
움직이는 것이며, 형이하학인 理가 사람에게 들어와 형성된 게, 차분한 형이상학인 性인데,
이 性이 몸을 만나 약간 오염되면서, "發"하여서, 情이 된다.는
주자학의 도식을 짧게 강독해주셨다. 시간이 흘러 다른 자리에서,
다산은 이 강고한 주자학의 구조를 깨뜨리며 다만 기호(嗜好)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하시며,
이는 근대적인 것이었다고 더 설명해 주셨다.
본질과 현상이라는 중세적인 이원적 분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 paradigm)의 탄생과,
점진적으로 크지 않으며, 푹 뛰어넘는다, 는 새로운 패러다임 탄생자체의 구조까지를
더듬어 헤아려볼 수 있는 한 사례로 이해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을 사는 내게는 이 두 가지 패러다임이 다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깊은 밤 강물을 따라 흐르는 작은 배 안에서,
다산이 처음으로 예수의 사상을 전해들었을 때겪었을 정신적인 충격과 습합의 길이 내내 궁금했다.
내가 들은 이 말이,
곧 내가 건너,뛰어,넘어,가야,하는 새 패러다임이라는 확신이거나 직관이거나 앎은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러나 습합은 이미 다산에게도 막힌 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건너뛰기 위한 도움닫기나 발판처럼 사상/몸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리.
강을 건너게 해주는 배처럼, 잠시 의지하는 언어(言語)처럼,
그렇더라도 사람에게는 짐승과 성인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것이니,
건너 뛰기 위해 이별할지라도 병존하면서 때론 경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
알모체를 설명하실 때,
소설가의 최고 염원이 가능한 한 무의식적이 되는 것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간혹 인용하셨는데,
나는 지난 속속 전까지, 새로운 창발성의 현상으로써 알모체를,
새로운 문장의 창조지대 즉 "인간의 창조"로만 이해했었다.
그러나 지난 속속에서 알모체의 강연을 들은 후,
내 오해/좁은 이해/에서 조금 벗어나오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소설의) 문장이 창조되는 낮은, 무의식적인 지대쯤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데,
창조의 행위자를 인간의 "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데,
창조주체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지형이 조금 새롭게 열린 것이다.
조금 무시무시했는데,
새롭게 표현해주신 알모체의 패러다임은 내게 거의 없던 것이었기 때문이며,
어둡고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
내 정신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데,
지난 속속에서, "걸어간 마지막 자리에서 내가 성취한 정신의 의연함이 나를 위한 것이 된다."고 하셨을 때,
나는 "의연(毅然/依然)한" 내 정신을 믿어야 한다,고
정신에 대한 수식어를 한 마디 보태주었다.
5. 상인
① 기도를 잊은지 오래인 내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문이 다가왔다.
"더 많이 알게하시고, 더 많이 되게하시고, 더 많이 돕게해주소서." 꼭 해야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한 시도 잊지않고 자나깨나 이 기도를 품고 이어가야겠다.
② "최선을 다해 걸어간 나의 마지막 자리"라는 말씀이 잔잔한 슬픔이 배인 싯귀 같았다. 최선을 다 하겠다고 새삼 다짐해 본다.
6. 김ㅅ연
단보선생께서는 최근 읽고 계신 책을 소개하시면서 사람에게 있는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의 특성을 코끼리와 코끼리를 탄 사람에 비유하셨다.
보통 사람은 자기의 선호와 취약 입맛을 꺽지 못하고 코끼리가 가는 대로 가고 후행적으로 변명을 하거나 합리화를 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내 생활의 모든 면이 이런 패턴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자각을 했다.
나는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 먹고, 마시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시고, 핸드폰을 그만 봐야지 하면서 계속 본다.
그나마 긴 시간 큰 돈을 지불하고 나를 강제로 묶어두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나의 코끼리는 폭음과 폭식의 길로 나를 데려가지 않고 있다.
속속 수업이후 내 일상의 면면들이 얼마나 내 무의식(코끼리)에 끄달려 진행되고 나는 사후적으로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하고 후회를 하는 패턴을 반복하는지 자각을 하게 되었다.
김유신과 바울처럼 내 코끼리가 가려는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단호하게 틀 수 있는 계기와 루틴을 쌓아나가는 것은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는 것과 같은 말이겠다.
7. 조ㅇ남
“홍색을 만나야만 공평해집니다.”K 선생
홍색을 들일 때에도, 수조를 사올 때에도, ‘언젠가는 사라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때에도, 선생님은 홍색에게 어떤 애착도 갖고 있지 않는 듯 보입니다. 서늘한 관계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과정속에 자신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고 하십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꿈까지도 책임을 질 수 있어 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십니다. 제가 생각하는 책임이란, 나와 애착으로 맺어진 관계나 내가 정성을 들인 일에 대해서 사후적 으로 응하는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중심은 저였고, 제가 한 만큼만 책 임을 지겠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책임은 애착을 넘어, 한 순간이라도 함께 했다는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어떤 무의식이, 그리고 얼마나 낮아져야지만이 이런 책임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낮아지고 또 낮아져 결국에는 세상 모든 존재의 생과 멸, 그리고 고통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 는 감각. 이것을 느끼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으로 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삶 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 중에 가장 실용적인 것은 낮아지고 낮아져서, 내 무의식까지를 변화시 키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8. 임ㅁ애
소통이란 일생의 숙제다. 이 숙제가 풀리는 날 모든 상처와 전쟁도 끝이 나겠지만, 아마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깨끗이 해소되는 방법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방을 청소하듯이 매번 쓸고 닦는 반복의 노동만이 가능한 희망이다. 모든 먼지와 오염을 싹 다 없애겠다는 것은 오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집을 허물어버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코끼리와 기수'의 비유를 들어 인간의 정신과 소통을 말씀하셨다. "직관과 감각 그리고 정서라는 압도적인 힘을 의미하는 코끼리와 그 힘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어 온 이성의 힘인 기수. 이성은 그저 코끼리가 지나간 자리를 뒤늦게 따라가며 그가 저지른 짓을 수습하고 변명하고, 사후에 변호하고 정당화 할 뿐이다" 이성의 생리적이고 근원적인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정작 타인과 빠르게 소통하고 교감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감정을 통해 상대의 감각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순간들이다. 그렇다. '짐승 같은' 몸은 벌써 판단을 끝냈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표정과 몸짓과 리듬으로 전달해 버린다. 상대 역시 벌써 몸으로 들어버렸기 때문에, 상황은 사실상 끝났다. 사후적으로 변호하고 합리화하려 애쓸 뿐이지만, 대부분 교정되기엔 너무 늦었다.
이번에 아들의 운전 연수를 통해서 느낀 소통은 분명 '이성'의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진동에 두 사람의 주파수가 일치했을 때, 둘은 말이 필요 없는(할 수 없는) 온전한 소통을 한 셈이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아들과 엄마의 관계였기에, 우선은 마주보지 않은 것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움직이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묘한 장소감도 있을 것이다. 속도와 변수들이 가져오는 불안과 어느 정도 단절된 동굴같은 안정감, 정면을 응시해야 하는 운전자와 자유로운 시선을 가진(동시에 운전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도 한) 동승자, 그리고 같은 진동과 역학에 맡겨진 몸의 흔들림.워낙에 반대의 힘들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일까. 이것 역시 완벽한 공(空)이 아닌, 적당한 중(中)으로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움직이고 있지만 안정적이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어느 정도 '감각의 활동반경'이 보장된 '장소'가 가진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막강한 힘을 가진 코끼리가 운신할 장소를 유연하게 제공함으로써 그 힘을 선용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느 완벽한 장소라도 그것을 감각하고 누릴 깜량이 없다면, 그야말로 '옆방의 부처'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코끼리의 행패를 온갖 변명으로 감추려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다면, 아름다운 풍경도 노랫소리도 들리고 보일 리가 없다. 그저 나를 앞질러간 어느 누구의 꽁무늬를 쫓으며 사냥하거나 사냥당할 뿐이다.
그러니 우선은 '알아야' 한다. 선생님은 타인을 "근본적으로 '저항'하는 존재"라고 하셨다, 세포막이나 피부 같은 막(膜)'이 존재하듯, 이미 생물학적으로 나와 타인 사이에 설정된 경계가 엄연하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타자는 '내 말을 안 듣는 존재'이자 내 논리에 완강히 저항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야'한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외부의 날카로운 비판이나 고통스러운 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얻어맞는 실존적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코끼리가 언제든 눈멀 수 있는, 힘세고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힘겹게 인정해야 한다. 타자와의 어긋남 속에서 수많은 재난을 수습하고 바로잡고 다시 시작하는 그 모든 순간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선생님은 "타인이 내 세계관에 거세게 저항하는 독립된 실존임을 이토록 뼈저리게 인정할 때야 비로소, 시간성을 견디며 서로를 조금씩 용납하는 '서(恕)'의 지난한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용서란 무엇일까. 매일 더러워지는 방을 용서해야겠다. 완벽히 깨끗하고 다시는 더러워지지 않을 경지는 없다. 흙탕물 같은 일상에서 매일 닦아 내야 하는, 그 반복의 노동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 여정만이 치우침 없이(中) 조화롭게(和) 적당히 응하는 법을 내게 가르쳐 줄 것이다.
9. 는길
〈'알면서 모른 체하기'와 四隣의 기별〉 강연이 나에게 남긴 것.
① 〈알모체〉는 물질과 정신에 관한 미래적 앎을 제공하지만 이에 유별난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 즉 ‘되기’의 문제로 수렴된다. 차분함, 낮은 중심, 에고로만 살지 않겠다는 삶의 양식으로 되돌아온다.
② ‘쓸모 있는 형이상학’이 있겠는가를 묻는다. 문화화 된 종교, ‘적응’에 만족하는 삶, ‘느낌’이나 ‘감동’을 소비하는 삶으로는 실존의 깊이에 가닿을 수 없다. 일부 수행자들의 남다른 결계와 집념이 부럽기도 했는데, 그들은 종교 형이상학의 규제를 받고 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을 더욱 깊게 살게 하는 공부의 형이상학이 있을까.
③ 강연 중의 가설이 옳다고 할 경우 ‘(홍색을) 만나야 되지 않겠나’라는 말을 들었다. 책임의 자리이다. 예수는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모른다”라고 했고, 인간은, 나는, 자신이 한 짓을 모르고, 책임에도 어둡다. 일순 내 존재의 개입이 두려웠다. 정신을 자라게 하는 애씀 속에서 나를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별 토의 시간에 ‘고귀함’이라는 단어를 남달리 들었다. 책임과 개입은 무시무시하지만 그렇게 낮아진 지대에서 무엇과 접속하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거기에 ‘고귀함(高貴)’도 있을까. 나를 보는 시선이 그렇게 교정될 수 있다면 자기구제의 한 표지가 될 수 있겠다.
10. 권ㄷ환
"그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암연이장 시간에 배운 이 문장은 주절이 아닌 안긴 절인 "그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되려 두 번째 서술절인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에 방점을 먼저 찍어보자.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 전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순간, “반박함으로써”라는 말을 배치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안긴 절의 기능이 약화되어 소외된다. 따라서 이 문장의 핵심은 마음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반박이라는 방식의 한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게다가 '그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의 마음에 접근해야 한다'라는 해석까지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학인에게 있어서 대화는 마치 무사에 있어 전투와 같으니) 이 문장을 ‘상대의 마음을 바꾸는 대화’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읽는다면, 반걸음 더 나아가 “그의 주장을 반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써 그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까지도 과감하게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암연이장 문장을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을 택하여서 그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로 치환해 보자. 그렇다면 반박이 아니라 어떤 방식을 택해야 할까?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우선 Affection Primacy를 인정해야 하고, 대화가 논리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 총체적인 행위라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Affection이 아무리 대화에 지배적이더라도 공부는 또 합리성을 이용하고 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그러면 논박하지 말라는 것이냐"라는 물음까지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암연이장 문장의 화살은 단순히 논리/합리/이성의 한계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도구적 이성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무력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 아니라, '더 넓은 이성'이다. Affection Primacy는 인지기능에 있어 감정이 선행한다는 의미이지 가치론적 우위를 가리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우선적이고 심지어 더 크더라도(코끼리), 독하의 말처럼 "감정적 판단은 자신의 역사성으로 인해 에고를 안 거치고 나오는 것"일 수 있으니 우리는 논리라는 도구 또한 '반박'하지 않고 이를 선용해야 한다. 대화 또한 몸을 가진 인간의 일이라는 걸 잊지 않고 Affection Primacy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현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경유한 뒤에 다시 돌아와 '코끼리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 이성'을 상상해 보자. 이는 대화라는 총체적 과정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대화의 정서적 조건과 수행적 성격까지 '포월(匍越)'(김진석)하는, 더 넓어진 논리/합리/이성이다.
11. 박ㅇ름
'사실'과 '당위'의 개념을 담아두고 싶다.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나 객관적 데이터를 뜻하며 '당위'는 마땅히 해야 하거나 되어야 하는 규범적 가치를 의미한다. 지난 204회 속속 모임에서 'Affective Primacy(정서적 우위성)'을 배운 바 있다. 이는 상대방을 말로 설득할 때 참조할 만한 꾀 가운데 한 가지로서, 인간은 이성적 판단이나 분석보다 '정서'가 더 우선적이기에 "상대방의 정서를 돌보지 않고 말에 이겨버리면 사후가 안 좋다."(단보선생)는 말씀이었다. 이날의 공부로 우리는 "그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암연이장 47)라는 문장을 암송했다. 이 문장은 인간관계에 정서가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잘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사실'과 '당위'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대화 속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지점도 짐작해 보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그 말 자체로 잘 들으려면 감정이나 느낌보다는 이성적인 머리를 쓸 줄 알아야겠고, '사실'과 '당위'의 개념을 인식하면서 암연이장 문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필요한 개념들을 밑바탕에 잘 채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2. 여일
① 매번 중국과 중국어 시간은 발제자가 무척 공들여서 준비해오니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번에 흥미로웠던 것은 중국인의 양생(養生) 문화이다. 찬물을 무척 부정적으로 여기고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을 즐겨 마신다는 것, 아침에는 따뜻한 죽이 보약보다 좋다는 것, 밥은 굶어도 차를 마시는 것, 공원마다 태극권, 춤, 턱걸이 등 남녀노소 함께 어울려 몸을 단련하는 등의 생활양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아, 저들은 일상의 마음 둘 데가 있으니 몸과 마음이 건강하겠구나 싶었다.
② 기이한 기별(초상현상)을 사례로 '알면서 모른 체 하기' 개념을 공부하였다. 보통 초상현상을 들으면 무척 놀라워하거나 부정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한다. 나는 어느 쪽일까? 놀랍고 저항도 조금 들고 혼란이 되기도 한다. 최신의 과학 지식과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존재, 정신을 아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우주와 생명과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이며 가장 기이한 초상현상이다.'홍색은 어디로 갔는가?' 이 물음은 홍색이 어떻게 사라졌는가 보다는 어디로 갔는지, 다시 만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 더 생산적으로 보인다. 정신과 홍색이 무관하지 않고 개입과 不二로 연관되어 있다면 정신은 四隣과 소통하는 '더 큰 나'로서 가능성과 윤리적 책임도 함께 요구된다.
13. 아무공
새로운 형이상학의 특징: ‘불이(不二, 또는 겹침)’, 비이원론적인 세계관. 세상을 조각난 상태 (에고의 시선)가 아닌 전체성으로 본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다(관념론적 상보성, 일원론). 정신과 물질은 소통 가능하다. 정신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 알면서 모른 체하기(샛길, 모순의 일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신은 진화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합한다.
'쓸모 있는(실용적인)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 보은 알기가 아니라 되기이다, 되기란 존재의 변화(코끼리)이다. 낮은 중심(무의식)을 중시한다.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내용이 필요하다. 내용에 유용한 것은 과학이다. 객관적으로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14. 독하
"쓸모 있는 형이상학"(단보선생)
형이상학의 쓸모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에 있다. 물질의 역사는 138억 년이며, 생명의 역사는 수십억 년이다. 물질로서, 생명으로서 외부와 응하며 생성한 패턴은 그 역사성으로 인해 개체로서 쉬 바꿀 수 없다. 그것이 물리 법칙이고 생명의 코드화(유전자)다. 여기에 필연성은 없다. 단지 우연에 기반한 역사성에서 비롯할 뿐이다. 개체로서 가능한 변화는 주어진 물리 법칙과 생명의 법칙(코드화)을 언어성을 매개로 축중시켜 새로운 패턴을 창발하는데 있다. 물론 그 새로운 행위 패턴은 정신적 차원(무의식)이 역사로서 지닌 기울기의 총체적 변화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패턴의 창발은 지행에서 비롯한 수행성과 관련된다. 불이적 존재는 무시받은 선구자로서 물질성과 생명의 패턴을 언어로서 드다루며 새로운 패턴을 창발한다. '형이상학'의 쓸모가 물질성과 코드화라는 주어진 형(식)의 외부성을 얻어 정신을 자라게 하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존재의 행위라는 역사성을 매개할 수밖에 없다. '행지(行知)'(단보선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