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돕는 이를 일러 상인(上人)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우선 공사간의 준별이 의연해서 그 의욕의 충실함이 든직합니다. 좋아한다고 갖은 괘사를 부리면서도 정작 도울 수 있는 실력이나 의욕이 없는 이가 곧 하인(下人)입니다. 하인은 무엇보다도 제가 하는 짓의 '형식'에 깜깜합니다. 하인을 알아챌 수 있는 방식은 여럿이고 쉽습니다. 그는 사적으로는 욕망에 대상에게 단물같지만,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때론 야차(夜叉)를 방불케 합니다. 하인의 사적 쾌락과 공적 무능력 사이의 어긋난 관계를 살피자면 차라리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와 칸트 간의 내적 일치를 부러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쾌락 속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영영 알아채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인의 본질입니다.
12. 옛말에 '개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는 못된다(三年狗尾 不爲黃毛)는 말이 있지요. 학인으로서는 끔찍하고 서글픈 품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진 못한다'는, 이 절망적인 냉소를 거슬러 지며리 싸우려는 게 공부길의 노동이므로, 여기에서 타자의 비평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한때는 '비평의 숲'을 말하기도 했지만, 일상적으로 동학들 사이에서 비평이 오가는 문화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비평을 '잘' 할 수 있는 게, 역시 실력 중의 실력이지요. 비평이냐, 자살(自殺)이냐, 라고 나날이 되뇌어 보아야 합니다.
13. 행지(行知)의 행(行)은 물론 '행하다(doing)'라는 뜻이지만 그 행함이 됨(becoming)과 관련되어 있는 게 독특합니다. 행지가 변증법의 일반론과 다른 점이지요. 또한 행지는 비코(Giambattista Vico)의 '아는 것은 그 자체로 만들어진 것(Verum esse ipsum factum)'과도 다릅니다. 비코의 전제 속에는 신학(creatio ex nihilo)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코의 인식론은 (한나 아렌트가 잘 정리한 바와 같이) 근대과학의 방법론적 인식과 연결됩니다. 요컨대, 실험/방법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근대과학의 능동적 태도이지요. 행지가 변증법이나 신학이나 혹은 근대과학과 다른 점은, 거기에 바로 수행(遂行)/수행(修行)의 자리가 빼곡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해온 행지의 개념 속에는 이처럼 됨(becoming)의 이념이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