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당신들의 기독교와 예수의 희망
알지 못하므로 부득불 믿게 될 것이나, ‘믿는’ 순간 부패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나 신불(神佛)등이 다만 ‘되지’ 않고 ‘믿기’ 위해 주어 진 최종심급의 심리제도적 장치였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장례식인 것입니다. 종교인(homo religiosus)으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호패는 ‘고백’이나 신념 혹은 어떤 감동의 울결 따위가 아닙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며, 가면의 일관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곧은 삶의 양식 속에서만 삶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삶․죽음의 총체성과 이를 생활정치화하는 일관성만이 그 영혼을 증거합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구성적으로 얽혀든 그 속도와 물매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 현실과의 날카로운 불화를 살피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마치 예수를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장송곡처럼 들립니다. 예수의 삶의 정황 (Sitz-im-Leben), 문제의식, 고민과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동, 그리고 삶이 그러했으므로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성격 등을 헤아리면, 종교에서 삶으로, 내세에서 현실로, 종말론적 환영에서 ‘지금 이것(今是)’으로. 고백에서 담대행방(膽大行方)의 행위로 나아가는 게 마땅합니다. 예수를 두 번 죽이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그를 ‘믿는’ 신자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가 있었으니 반드시 ‘(당신들의) 기독교’가 필요치 않으나,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남을 따르려는 삶의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자란 ‘타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입니다.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 떼처럼 번성합니다. 이제 ‘신자’의 파리 떼와 그 파리대왕들의 틈 속에서 유일한 가능성은 ‘제자’이지만, 아,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그 스승을 ‘믿지’ 않은 채 그보다 앞서 걸어가는 공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