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통신(1)
20250412_182회 속속
포스트포드주의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의식
1. 20세기말 ‘예술’ 개념을 다루는 거의 모든 학문적 영역에서 중요한 논제는, ‘예술의 자율성’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물론 ‘재현’의 문제가 중요했다. 예술은 사회를, 현실을, 삶을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해야 하는가, 그리고 작품은 실제로 재현하는가? 하지만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가령 뒤샹의 샘(1917), 다다이스트들의 선언들(1920), 하인리히 안톤 뮐러의 아르 브뤼트(art brut, 장 뒤뷔페의 개념화) 혹은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 영미권의 개념화)와 같은 예술작품이 등장했고, 이것들은 더 이상 재현의 틀로는 사유할 수 없는 현상임이 판명되었다. 예술은 더 이상 사회, 현실, 삶을 그 바깥에서 어떤 시점을 취해 바라보지 않는다. 선형원근법의 패러다임은 무너졌다. 종전 후의 문제는 이제 세계화 혹은 자연화된 ‘자본주의’의 문제였다.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사람도, 사물도, 심지어 신도 마찬가지다. 모두 소외된다. 그러면 예술은 어떤가? 예술도 상품이 되는가? 아니면 예술은, 예술만은 우리를 상품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소도(蘇塗)와 같은 영역일 수 있는가? 예술의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인간이 당면한 소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었다. ‘예술의 자율성’ 개념은, 예술은 사회와 별개의 독립적 영역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술은 (완전히 자본주의화된) 사회와 스스로를 구분함으로써 수행적으로 정치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2. 21세기초, 그러니까 최근 등장한 중요한 이론가들은 ‘재현’과 ‘예술의 자율성’ 개념 사이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것은 둘 모두가 예술과 사회, 현실, 삶을 ‘분할’하는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재현은 사물과 기호가 구분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이 사회로부터 적어도 브레히트적인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그러나 이는 포드주의적 시대착오다. 아무것도 아무것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2.1, 2.2 하지만 일종의 자동적 포획(automatic captivity)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포드주의의 전면적 내재화를, 그에 대한 가치개념 및 태도까지 반영하여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히토 슈타이얼의 개념, “자유낙하”다. 우리는 자유낙하하고 있다.
2.1. 개념미술의 역사에서 예술적 사물의 비물질화는 우선 시각성의 물신적 가치에 대한 대항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후 비물질화된 미술품이 자본주의적 기호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면서, 자본주의의 개념주의적 전환이 일어난다. (알렉스 알베로)
2.2. 예술의 자율성이 노동분업,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소외와 주체화의 거부를 바탕으로 한다면, 이 거부는 이제 잠들어 있던 작금의 확장을 해방시키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생산방식으로 재통합되었다. [...] 자본은 자체적인 자율성의 해석을 구상하며 대응했다. [...] 자기 결정권에 대한 욕망은 자율창업적 사업유형으로 다시 표현되었고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은 연속적 자기도취 및 자신의 직업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로 변신되었다. [...] 소외당하지 않는 직업들이 제시하는 소외외 완화는 보다 만연한 자기 억압의 형식으로 발현된다. (히토 슈타이얼)
3.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각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드론(drone)일 게다. 이 시대는 항공사진, 3D급강하, 구글/네이버맵의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원근법적으로 세계를 마주하지 않는다. 이른바 “공중으로부터의 재현”(슈타이얼 2012, 29)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본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관점의 전치는 기계와 여타 사물에 위탁되어 육신을 떠난, 원격조종된 응시”의 문제다(31). 인간은 유체이탈하여, 드론에, 그리고 일상적으로는 스마트폰에 깃든다. ‘자유낙하’란, 결국 바닥없음의 사태이지만, 아도르노를 비롯한 그 이전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슈타이얼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다지 절망하지 않는다—아니, 절망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타락이자 해방”(36)이다….
4. 거장들의 시대는 끝이 나버렸고, 산업생산이 예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예술철학은 내내 예술의 지위 하락을 고뇌했다. 정말 새로운 것은 더 이상 고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간 예술이 사회에 점령된 것을 생각해왔지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예술점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적 생산관계의 바깥을 식별할 수 없는 포스트포드주의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에 발맞춰 더 이상 대전(大戰)의 시대가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내전(內戰)의 시대가 왔는데, 그건 다름아닌 테러리즘이다. 테러리즘은 세계와 세계의 이미지를 구별할 수 없는 시대를 말한다. 이 테러리즘은 이교도들이나 스파이들의 시대와는 다른 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테러리즘은 삶으로부터 불안스런 징후들을 끊임없이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콜린 파월은 어떤 트럭을 테러리스트들의 것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다. ‘무로부터(ex nihilo)’ 테러리스트들의 트럭을 창출해낸다. 이미지들은 소위 주술적 권력을 행사한다. (이는 정확히 일상적인 차원에서 SNS이미지에 의해 점령당한 개인들에 대응될 수 있다.)4.1.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 오래전에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개념을 통해 있는 것은 이미지뿐이며 우리는 이미지의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감추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고뇌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지배는 타락이 될 수도 있고 해방이 될 수도 있다.
4.1. 미술적 생산은 냉전 이후 지배적인 정치패러다임으로 설정된 듯한 초자본주의의 포스트민주주의적 형식을 반영하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현대미술은 예측을 불허하고, 설명되지 않으며, 반짝거리고, 변덕스럽고, 기분파에, 영감과 천재들에 이끌린다. [...] 동시에 실질적인 미술생산이란, 새롭게 대두된 빈털터리들 다수에게는 jpg명장과 사칭 개념주의자로서, 우아한 화랑직원과 과열적 콘텐츠 제공자가 되어, 요행을 노리는 작업장이 된다. 미술은 엄밀하게는 파업노동이기 때문이다. [...] 파업노동자는 감정, 지각, 특성을 가능한 모든 규모와 변종으로 대량생산한다. [...] 파업노동은 탈진과 속도, 마감과 협잡전시기획, 한담과 고급인쇄로 연명한다. 또한 가속화된 착취로써 번창한다. 살림이나 간호와 마찬가지로, 미술은 무급노동이 가장 보편화한 산업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부유하는 진창은 차고 넘치는 근면한 여성들의 역동성으로 순전히 지탱된다. (히토 슈타이얼)
5. 지가 베르토프에 따르면, 만약 모든 것이 이미지라고 해도,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졌던 적이 없다. 원래의 삶이라는 것은 이미지 속에서야 비로소 창조되는 것이다. “촬영이 있어야 비로소 진위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삶은 이미지와의 관계 맺음(이것이 곧 예술일진대) 속에서 나타난다. 예술작품(완성된 이미지)이란 원래부터 어딘가에 외따로 존재하는 삶을 ‘재현’하는 것도, 삶과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정치성(the political)과 실존(the existence)을 창출하는 ‘자율적인 것’도 아니다. 이미지에 의해 삶을 어떻게 새롭게 나타나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테러리즘은 삶을 테러로 나타나게 하고, 포스트포드주의는 완전히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된 노동자의 삶을 요한다. 예술은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6. 여기에 두 가지 다른 길이 있다. 한편에는 ‘삶과 예술의 일치불가능성’을 선언하며, ‘이미지 스팸’을 거부하고 기꺼이 ‘가난한 이미지’가 되려고 하는 길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삶과 예술의 경계 해체’를 성취하려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무엇보다 시태를 이미지의 프레임으로 보지 않는다. 이 진영은 예술과 사회, 현실, 삶을 ‘분할’하는 질서가 더 이상 있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삶과 정치가 미학화되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길은 다른 객관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객관성을 통해 삶과 예술을 합치시키고자 한다.
7.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는 두 길 사이의 차이에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공통점을 지적해야 한다.) 최근 담론의 도정에서 중요한 것은, 둘 모두가—한쪽은 ‘이미지-사물’이 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새로운 객관성으로서의 기계-사물’이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탈인간, 탈주체의 길을 향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매우 중요한 세 개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1) 쿠툴룩 아타만(Kutlug Ataman)의 설치예술/비디오아트 「쿠바」(2004)는 각각의 증언 앞에서 영원히 고립되고 정지되어 있는 분산된 무리를 창조한다. 공론장 같은 것은 없다. 감정동기화(emotional synchronization)가 있을 뿐이다. 2) 프란체스카 우드만(Francesca Stern Woodman)은 사라지고 싶은 존재의 욕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집」(1976)은 사물들 속으로 녹아 없어지는 주체를 보여준다. 그녀는 나뭇가지가 되고 싶어하고, 가구가 되고 싶어한다. 3) 마리옹 라발-쟝테(Marion laval-Jeantet)의 「아마도 말이 내 안에 살고 있을지도 몰라」(2011)는 동물되기를 실험한 비디오아트다. 라발-쟝테는 여기에 말의 피를 대량으로 주입받고 고열, 구토, 감염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담았다. 그녀는 실험실 동물이 겪는 것을 동일하게 겪음으로써 그들을 일종의 켄타우로스로 신화화하고 그 자신도 그 괴물이 되려 했다. 21세기의 우리들, 우리들은, 정동의 덩어리(혹은 맥루한이 말했던 라디오의 부족의 북(tribal drumming)으로 녹아들고자 하는 것)가 되거나 사물이 되거나 아니면 동물이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