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나는 소리선생과 마주앉았고, 우리 사이에는 북이 있었다. 선생이 먼저 북을 치며 소리를 했다. 소리 몇 마디가 길을 내주고 사라져간다. 나는 소리를 내어, 사라지는 그 소릿길에 들어서서 뒤따라가야 했다. 내 소리가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선생은 지체 없이 다시 소릿길을 내주었다. 그래도 내가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북소리로, 또 자신의 소리로, 내 소리가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었다. 나는 어렵게 선생의 소리가 지나간 길에 들어서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은 "옳지!"했다. 나는 길 없이 헤매다가 제 길에 탁 들어섰을 때의 후련함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소리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토록 풍요로운 소리속을 내 소리가 여간해서는 오다닐 수 없다는 사정도 분명해졌다. 소리공부는 한두 해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나의 짧은 소리공부는 중단되었다.
내 소리가 소리속을 오다니지는 못하겠지만, 한 5년 쯤 잡아놓고 소리를 들으며 판소리사설을 꼼꼼하게 읽어내 보려고 한다. 첫번째 마당으로 沈睛歌다. 서문당에서 출간한 심청가(신재효 지음/강한영 옮김)와, (사)한국판소리보존회 정보마당의 인간문화재 성창순의 심청가 사설집 전문을 동시에 읽어나갈 예정이다. 두 판본의 첫 시작은 아래와 같다.
*
송나라 원풍(元豊) 말년에 황주땅 도화동에 한 소경이 있었으되, 성은 심씨(沈氏)요 이름은 학구(鶴九)라, 누대 잠영지족(簪纓之族)으로 문명이 자자터니 가운이 영체(零替)하여 조년에 안맹하니, 낙수청운(落水靑雲)에 발자취 끊어지고, 금장자수(金章紫綏)에 공명이 비었으니, 향곡(鄕曲)의 곤한 신세 강근(疆近)한 친척 없고 겸하여 안맹하니 누가 대접하랴마는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검하고 지조가 경계(耿介)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을 경솔히 아니하니 사람이 다 일컫더라.
신재효, <한국판소리전집>, 강한영 옮김 (서문당, 1996) 63쪽.
<아니리> 옛날옛적 황주땅 도화동에 한 소경이 살았는데, 성(姓)운 심가(沈哥)요, 이름은 학규(學奎)라. 누대(累代) 명문(名門)거족(巨族)으로 명성(名聲)이 자자터니, 가운(家運)이 불행(不幸)하여 삼십전(三十前)에 안맹(眼盲)하니, 뉘라서 받들소냐.
성창순 심청가 사설집에서
*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심청가의 시대적 배경은 송나라 원풍(元豊) 말년이다. 원풍은 북송 신종 때의 연호(1078~1085)이다. 그 당시 이 땅은 고려다. 조선왕조를 벗어난 곳이다. 어디 살던 사람들 이야기냐면, 황주땅 도화동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다. 황주라는 땅 이름은 황해도에 있다. 판소리를 글로 정리한 동리는 전라도 고창현 사람이다. 동리는 소리꾼들의 소리를 듣고 즐기며 이를 정리했을 테니, 그들은 서로 찾아다닐 수 있을만한 지역에 살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며, 소리꾼은 천연덕스럽게 첫 말을 뱉는다. "이 이야기는 옛날옛날 이야기이고, 여기 살았던 사람 이야기도 아니랍니다." 소리꾼은 먼 곳을 먼저 가리킨다.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까닭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서를 노래하는 일은 그만큼 위태로웠을 테고, 남이 살았던 이야기를 전하는 노릇 또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겠지. 소리판이 열리면 소리꾼은 가장 먼저 스스로와 거기 모인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간다. 딸 팔아서(공양해서) 눈 뜬 이야기이니 미안하고 무안해서라도, 옛날 어느 먼 곳에 살았던 사람 이야기여야 모두 즐겁게 들을 수 있었을 거다. 강정열 명창이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자. 심봉사는 뺑덕어미를 잃고 탄식하는데, 어찌나 노래를 잘하는지 도덕이 접근을 하지 못한다. 시원허고 장히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oM8sfvj0wsg&list=RDoM8sfvj0wsg&start_radio=1
또다공은 또다공의 성취를 발표하는 자리라고 알고 있으나, 공부가 부족하여 저의 또다공을 소개하는 것으로 우선 시작하겠습니다.
출력물이 필요하신 분들은 한부씩 출력을 해오세요.